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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Dec 09. 2018

나그네의 두려움

창 20:1-18

아브라함의 두려움에 대한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아브라함은 왜 그랄에 거하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행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상의 물음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붙박이가 아닌 나그네로 사는 아브라함의 형편을 고려한다 해도, 자기 아내를 지켜내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아비 친척집을 떠나 올 때만 해도 큰 희망으로 설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로 사는 객지의 삶은 마냥 파랑새가 우는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을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의 그 절박한 심정과는 또 다른 무기력증까지 엿보인다. 지난날 애굽에 내려갔을 때의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체험했던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같은 위험에 노출되었다.     


  문명의 중심에 살던 사람이 광야의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조카 롯이 거주하던 도성인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불과 유황에 뒤덮이고 멸망하였다. 척박한 땅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들도 생존이 힘든 세상에서 나그네로 한 곳에 정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떤 연유로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되었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아내를 드러내 놓고 자신의 아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경건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 그 땅의 지배자가 여인을 데려갔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첩실로 데려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무슨 항거를 했다거나 자기 아내를 지키기 위한 어떤 행동을 취했다는 내용이 없다. 아내를 빼앗기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수치를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는지, 아무튼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 기근이 들어 애굽에 내려갔을 때도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고대 근동의 생활양식, 그러니까 당시 시대상황에서 그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누구도 이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그네로 타지에 들어간 자의 생사여탈권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가 아내를 지킨다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지역의 군주로서 자기 땅에 흘러들어온 나그네 중 한 여인을 취하는 것은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권력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비멜렉을 꼼짝 못 하도록 만들어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돌려주도록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이다. 꿈을 통해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의 간섭은 분명하고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아직 아비멜렉은 사라를 범하지 아니한 상태였고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간섭하심은 예방을 위한 적절한 조처였다. 아비멜렉이나 아브라함 모두에게 신속하고도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모두가 하나님의 큰일을 위한 섭리의 진행이다. 구속사의 중심에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중심에 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오실 구속주에 대한 언약이 어떻게 신실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일신상에 일어나는 상황들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일 지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큰일인 구속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구속사의 흐름에 중대한 오류와 위험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개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의 역사는 사람이 주도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섭리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의 경우와 유사하게 아비멜렉으로부터 많은 보상을 받는다. 아비멜렉의 생명의 여탈권과 생존에 대한 보장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아비멜렉에게 임했던 모든 하나님의 징계가 처리되고 해결된다. 아브라함은 땅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매고 푸는 열쇠를 가지고 행사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천국의 열쇠와 같은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뜻을 따라 일을 주관하고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 세상의 왕이요,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하늘의 뜻을 선포하며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삼중 직임을 따라 그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책무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번성과 축복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주어진 부대조건인 것이다.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한지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계시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랄에서의 아비멜렉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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