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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Dec 11. 2018

아브라함 장막의 크리스마스

창 21:1-34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사라는 임신하여 이삭을 낳았다. 이삭의 출생은 통상 진행되는 자연적인 출산이 아니었다. 사라는 본래 불임이었고 더구나 잉태할 만한 시기를 넘어선 노년에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 이루어진 특별한 일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큰일이다.    


  이삭의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을 가졌다. 사라는 하나님의 잉태 고지에 대해 웃었었다. “어떻게 불임이었던 내가, 그것도 노년인데 아이를 잉태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웃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피조물인 인간의 수준에서 자연적인 과정으로는 도무지 잉태할 수 없는 처지였던 사라로서는 수납하여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큰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웃음)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일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넘쳤을 것이다. 아들 이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큰일을 늘 기억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내신 큰일이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장막에서 일어났다. 이삭의 출생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났다. 아브라함의 연약한 믿음의 행위로 첩실인 하갈을 통해 출생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는 일에 쓰일 적자가 아니었다. 이스마엘은 육의 방식으로 온 훼방꾼이었고, 아브라함의 장막에 언약의 후손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쫓겨난다. 그 일에 사라의 질투라든지, 하갈과 이스마엘의 과도한 행위들이 이유로 덧붙여진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내신 구원의 길이 아닌 육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아브라함의 장막으로부터 하갈과 이스마엘을 분리시킨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온 인류 안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는 구원이기에 이스마엘의 후손도 번성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막으로부터 쫓겨나 죽음의 상황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돌보신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해서도 살피시고 돌보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고귀하고 이 땅에 생존하며 하나님의 은택 아래 살아간다. 최종적 구원과 관계없이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고 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평가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창 20장의 사건을 통해 깨달은 것은, 아브라함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아비멜렉은 한 지역의 왕으로서 그 지역의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자이다. 그런 그도 아브라함을 어찌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간섭은 생생하였다. 가슴 떨리는 경험을 한 것에 대한 소회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물에 관한 건을 아비멜렉에게 말한다. 그 땅의 주인인 아비멜렉에게 전에는 그토록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물은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그 땅의 붙박이가 아닌 이방인 나그네로서 그 땅에 거주하려 할 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우물을 얻을 때마다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우물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렇게 빼앗기고도 감히 말할 수조차 없었다. 간뎅이가 붓지 않고서야 감히 우물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아브라함은 담대하게도 아비멜렉을 향하여 우물에 대한 권한을 말하고 있다. 전에 수차례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의 우물을 빼앗아갔던 사실을 들먹이며 아비멜렉을 책망까지 한 것이다. 그렇게 지위가 격상된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던 연고로 아비멜렉은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곤경이 사라를 취하려 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모든 것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실상은 아브라함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 두려운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의 힘의 근본은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는 아비멜렉에게 우물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하면서 양과 염소를 주어 증표를 삼고 언약을 세운다. 그 말은 우물을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정당한 값을 매겨 주면서 매매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변개하지 않도록 그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분명히 설정한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비멜렉이 큰 두려움 가운데 그렇게 허락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언제 태도를 바꿀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땅에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허락받고 그 땅에서 평안히 살 수 있는 조건을 이루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생존과 번성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중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올 자로 세상을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척박한 땅에서 아브라함이 생존하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면서 동시에 전 인류를 위한 삶인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은 구속사의 한 부분으로 바라볼 때 그 의미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바로 성도이다. 거룩한 백성,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간섭하심 아래 사는 자이다. 성도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세상 구속을 위한 큰 경륜과 작정 속에 진행된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성도 개개인의 삶에도 항상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돌보심이 있다. 성도가 연약하여 넘어지거나 실수할 때에도, 세상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은 계속되고 있다. 성도의 삶에 일어난 흥망성쇠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관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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