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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May 13. 2017

향수鄕愁

   햇볕에 그을러 새카만 얼굴에 두 눈 말똥말똥 뜨고 학다리처럼 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은 발에 흙먼지 덕지덕지 붙은 구멍 난 타이어 표 까만 고무신 신고 공군 장교로 제대한 삼촌이 가져다준 공군 점퍼를 입었는데 너무 헐렁해서 반코트처럼 길게 늘어져 아랫도리까지 덮인 채 때에 절어 반지르르한 손을 눈사람처럼 빼꼼히 빼들고 바람만 불어오면 코를 씩씩 불어대며 훔치느라 바쁘다  

  

   그래도 동무들과 어울리느라 비만 오면 진창이 된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갖 놀이에 여념이 없다. 허기진 배는 아무리 먹어도 언제나 꼬르륵 소리 내뱉는데 기다란 주머니에 어머니 몰래 숨겨온 생쌀을 조금씩 꺼내어 야금야금 먹는 재미로 이빨 상하는 줄도 모르고 씹어댔다. 기차역 화물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마른 고구마를 몰래 훔쳐 주머니 가득 채우고 잘근거리며 먹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고 해거름의 초가지붕 집집마다 밥 짓는 하얀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저 멀리서 동네 강아지들 컹컹거리는 소리가 아련하다.    


   석산의 노역에 지친 죄수들도 대열을 이루고 감옥으로 돌아가며 부르는 새마을 노래가 멀리서 메아리친다. 비릿한 갯내음이 바람 타고 전해질 즈음 저녁 먹으라고 아이들 부르는 어미들 소리가 귓가에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고즈넉한 저녁의 뿌연 안개가 깔리면 풀벌레 울음소리와 어디메 숨었다 나왔는지 박쥐 떼가 이리저리 하늘을 휘저으며 찍찍거리면 칙칙한 장마 내음새가 끈적끈적 얼굴에 들러붙는다.    


   호롱불에 불 밝힌 어둑한 방에 등겨 불 풍로질로 지은 꽁보리밥 차려진 저녁상에는 서른게 장 들깻잎 구수한 된장국 푸짐도 하여 둘러앉은 식구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바라보는 어미의 얼굴은 흐뭇하기만 하다. 젓가락질이 수월찮은 막내 녀석은 아예 젓가락은 제쳐두고 두 켤레 반 젓가락질에 바쁘다. 손에 묻은 젓갈을 넉살 좋게 입으로 쪽쪽 빨아대며 다 비운 밥그릇을 냅다 들이밀며 더 달라고 졸라댄다. 이래저래 부산한 저녁상이 게 눈 감추듯 거덜 날 즈음 휘영청 보름달이 긴 그림자로 방안 가득 밀고 들어온다.   

 

   후덥지근한 장맛 바람에 모시적삼 저고리도 귀찮아져 훌러덩 벗어던진 사내들이 하나 둘 새팍의 정자 아래로 모여들고 새카만 연기 모락모락 올라오는 모깃불 소리가 타닥거리면 연신 부채질에도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바탕 몰아치는 샛바람이 반갑기 그지없고 구성지게 한소리 뱉어놓는 아낙의 육자배기에 흥이 돋는다. 얼쑤 장단 맞추는 소리로 등허리의 땀은 식을 새가 없고 한바탕 어울리는 소리는 달무리진 하늘에 멀리도 퍼져간다.    


   그새 아득하게 잊혀가는 고향의 저녁 하늘이 서서히 내려앉는 땅거미 속에 쏟아지는 빗살과 함께 가슴팍에 파고든다. 아! 부채질로 싸우던 삼복더위를 무덤덤하게 지나치며 떠오른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배고파 죽을 지경이던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너무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 된 요새 세상을 생각한다. 너무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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