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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Feb 08. 2022

브니엘

창 32:1-33:20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결별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다.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떻게 야곱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인 줄 알았을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알리고자 하는 중요한 사실만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자들에 대해 알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자들은 큰 군대와도 같았고 야곱 자신을 능히 보호할 만한 힘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 중요한 일을 경험한 곳에 대해 뭔가 표식을 남겨 다음에도 기억하고자 했을 것이다.      


외삼촌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설렘과 기쁨이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야곱의 심사는 편하지가 않다. 그곳에는 형 에서가 야곱에 대한 적개심으로 분노하며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야곱은 형 에서가 어떤 모습으로 자기를 대할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이런 야곱을 도우시려고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을 보내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큰 군대의 모습으로 보내어 야곱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음을 보이신다. 야곱은 큰 두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더욱 담대하게 나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인간적인 수단과 방편들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것은 야곱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위기 앞에 서면 믿음은 약해지고 두려움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로 사람들을 보낸다.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많은 선물과 함께 사람들을 보내며 여러 말로 자기를 낮추어 형의 마음을 녹여보려 시도한다. 그런데 사자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은 야곱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것들뿐이다.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는 말에서 보듯이 야곱은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자기와 함께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그렇게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 밤에 야곱은 여러 수단들을 강구한다. 형에게 보낼 예물을 따로 준비하고, 여러 떼로 나누어 각기 거리를 두어 에서에게 나아가도록 한다. 앞선 떼를 치면 뒤따르는 떼가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수단이다. 예물로 형의 마음을 녹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야곱의 급한 심사를 엿볼 수 있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다. 그렇게 선물과 함께 여러 떼를 보내고도 불안하여 자신은 얍복 강가에 홀로 남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모두 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이 위기의 밤에 야곱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가장 곤란하고 위급한 상황에 몰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신다. 그리고 그 씨름에서 야곱에게 져주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씨름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당연히 힘센 아버지가 이기는 게 맞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다. 져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시고 야곱에게 져주신다. 그리고 거기서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신다.      


야곱,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자,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꾀쟁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큰 부를 이뤄낼 만큼 능란한 수완을 가진 자, 그런 자에게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특별한 이름을 주신다. 야곱은 세상의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하늘의 이름이다. 땅의 사람인 야곱이 하늘의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과 미래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성경의 인물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때에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야곱을 통해 장차 이루어지는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구속사의 과정이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음에도 생명이 부지될 수 있었음을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을 보면 죽으리라는 것이 범죄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의 법칙이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과 대면하였음에도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찾아오시고 만나주시며 새 이름을 주신다. 앞으로 야곱과 어떻게 함께 하실 것인지를 보이시고 야곱의 믿음을 북돋아주신다.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용기를 주시고 담대히 나아가도록 하신다.     


밤새 씨름하며 환도뼈가 탈골된 상태로 지쳐서 다리를 절며 형 에서를 만나러 나아가는 야곱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 모습을 바라본 에서의 마음도 헤아려보자. 에서는 야곱이 떠나간 후로 세일 땅에 거주하며 그 지역의 군주가 된다. 에서는 기골이 장대하여 사냥을 잘하는 사내의 기상을 가졌다. 고대사회에서 사냥을 잘하며 힘이 있는 자는 사람들의 머리가 될 만하다. 에서는 세일 땅의 왕이었다.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가진 자로서 야곱이 가진 것들을 볼 때 별로 크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군주의 기상과 지닌 권세와 부요함으로 야곱이 가진 것들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다만 과거 야곱이 자기를 속인 것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야곱을 상대하려고 쫓아온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게 나아오는 야곱의 몰골을 보니 형편이 말이 아니다. 밤새 씨름하다 지쳐 다리를 절며 오는데 순간적으로 측은지심이 일어난 것일까! 형제지간의 정이 새롭게 일어난 것일까! 에서는 야곱을 흔쾌히 받아준다. 그런데 야곱은 여전히 불안하다. 언제 형의 마음이 바뀌어 자기를 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형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천천히 뒤따라가겠다고 한다.      


형이 떠난 뒤로도 야곱은 곧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여전히 형에 대해 불안한 까닭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이 머무르는 장막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함께 하시고 돌보시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나 야곱은 연약한 모습으로 세겜에 머무르고 있다.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때 머뭇거리고 있다. 그 결과가 곧바로 다음에 일어나는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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