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 불통 - 소통
사용한 그림은 네이버 블로그 이웃인 [그림성경]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이 그냥 물질적인 소통뿐이었을까요?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소통은 마음이 없이는 불가합니다. 마음의 소통을 이룸이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소통, 죄로 말미암아 불통인 세상에 복음의 강력한 침투로 인하여 생긴 결과는 소통입니다. 범죄 이전의 상태는 모든 것의 원활한 소통이었습니다. 범죄 이후의 상태는 모든 것이 막힌 단절과 불통입니다. 복음 안에서 온전한 소통에로 나아감이 교회의 자기계시입니다.
인간은 계시적 존재이고, 그 자기계시가 활발하게 막힘이 없이 진행됨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입니다. 교회는 소통의 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나 죄아래 사는 인생에게 있어서 자기계시는 자기의 허물을 들춰냄이어서 수치와 모욕의 빌미가 될 뿐입니다. 중생자의 자기계시는 아름답습니다. 심지어 죄와 수치까지도 하늘의 위로와 평강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함을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자의 자기계시로 인하여 드러난 허물진 과거사는 그대로 그 사람의 약점이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왕따를 경험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기계시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도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자에게는 지난 허물까지도 감내할 만큼 하늘의 위로와 평강을 맛보았기에 기꺼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고 그런 허물의 사함을 받은 경험을 나눌 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통이 결과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이었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이뤄져야 할 소통입니다. 죄를 자랑함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난 은혜를 함께 나눔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밖에 자기를 계시하심으로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하나님의 솜씨를 모방하고 흉내 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대로, 사람도 자기를 계시하는 계시적 존재입니다. 사람의 계시는 물론 피조물 수준에서의 계시입니다. 신적 계시의 완전성은 없어도, 피조물 수준에서 인간의 계시는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자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창조(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있음 有'으로 일컬어지는 것)를 통치하는 왕적 권세입니다. 인간은 계시적 존재로서 자기를 자기 밖에 투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인간도 자기를 자기 밖에 나타내므로 즐거워합니다. 자기를 나누고 소통(교제, 코이노니아)함으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나눈 에덴에서 이룬 생명의 교통은 기쁨이었고, 피조물 아담/하와가 누린 생명의 교통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담/하와는 온전한 자기 계시로 서로가 부끄러움이나 감출 것이 없이 서로에게 모든 것을 나누는 생명의 풍요함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던 것은 그 교제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의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계시하던 데에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시작했고, 서로에 대해 의심을 하며, 서로의 부족함에 대해서 멸시와 비웃음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의 죄는 믿음을 상실한 큰 악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상실하였기에, 자신도 믿지 못하므로, 자신의 말도 보증할 수 없고, 이웃의 말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부끄러움만 드러나고 신뢰할 수 없기에, 인간은 더 이상 계시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창조세계는 혼돈에 빠졌고, 믿음보다는 불신과, 자기 계시보다는 자기를 감추기에 더 급급하였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창조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종말에는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구속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의 모든 사건은 창조세계의 구원과, 하나님의 창조 목표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한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서로 유무상통하여, 죄가 들어온 이후 단절된 온전한 소통(교제, 코이노니아)이 회복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에게 온전히 자기를 계시하여 보임으로, 서로가 서로를 감출 것이 없이 나타내었습니다. 죄사함 받은 기쁨을 나누며, 거짓이 없는 진실함으로 서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질서가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앞에도 그러하지만 사람끼리의 관계도 가릴 것이 없는 온전한 자기 계시로 서로를 나누며 생명의 풍성한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늘 발목을 잡습니다. 온전한 자기 계시는 자기 안에 숨은 부끄러움이 없어야 가능한데,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누구나 숨은 부끄러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효능인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교회는 온전한 자기 계시를 이룰 수 있는 기초를 가집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도 어렵지만, 죄된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 계시적 삶을 이룰 수 없도록 훼방합니다. 우리는 죄사함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향하여 부끄러움 없이 자기를 열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열어 보여야 하는데 보일 수 없는 아픔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와 허물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계시에는 지혜가 필요하며,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없는 자기 계시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유발할 것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죄인을 향한 인간의 평가는 돌팔매질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게 합니다. 서로를 감싸고 허물을 덮어주는 온전한 사랑으로 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고, 온전한 자기계시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자기의 숨은 부끄러움도 내놓을 수 있는 용기는, 죄사함 받은 기쁨에서 출발합니다. 교회의 직분, 사회적 신분의 격, 인생 역경을 헤쳐 나온 나이의 값, 이런 것들이 인간 내면의 죄악 됨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로 자기 계시를 하려 하면 오히려 반감과 적대감만 커질 뿐입니다. 그런 것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죄의 자랑일 뿐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교만이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유무상통할 수 있는 신실한 교회를 이루기 원합니다. 종말에 주님 다시 오시면 온전한 교제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서로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에게로 내려오고, 어린양이 등이 되어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더 이상 해와 달이 필요 없이, 모든 생명을 공급하는 땅의 것이 폐하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의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 되어 우리에게(구속의 완성으로 이루신 전 창조 영역에) 생명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날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죽음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픔도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죄인의 허물과 아픔들이 다 없어지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를 온전히 나누고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픔과 슬픔과 거리낌들로 가득해서 서로에 대해 분노하고 적개심이 가득해서 미워하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깊은 슬픔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효는 참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게 우리의 소망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생명을 나누시고 부끄러움 없는 계시로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자유로, 죄사함의 기쁨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나누는 은혜 가운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거리낌 없는 계시에로 이르게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