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by 주용현

교회란 예수의 몸이다.

교회란 예수의 십자가에 피 흘려 찢기고 상하여 죽은 몸이다.

교회란 예수의 무덤에서 살아난 부활의 몸이다.

교회란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믿는 모든 자의 모임이다.

교회란 예수와 신비한 연합을 이룬 한 몸이다.

교회란 예수를 머리로 하고 한 몸이 된 지체들의 한 생명공동체이다.

교회란 예배당 건물이 아니다. 예배당 건물은 교회가 회집 하는 장소일 뿐이다.

교회란 예수의 죽고 부활한 생명을 공급받은 새 생명의 공동체이다.

교회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사 아버지의 아들의 나라에로 옮겨진 새 생명 공동체이다.

교회란 죄악 된 방식으로 살던 삶의 전 영역을 의와 거룩에로 방향을 전환한 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다.

교회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들이다.

교회란 죽었던 의식이 살아나서, 육으로 살던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어 영으로 사는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다.

교회란 생명의 길을 안내하는 진리의 등대이다.

교회란 인생의 목표와 참된 가치를 일깨우고, 하늘의 생명을 받아 세상에 흘려보내는 통로이다.

교회란 죽음의 세상에 생명의 불씨를 일으켜 하늘의 생명으로 살게 만드는 권능의 통로이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까닭에, 교회는 세상에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란 한 생명의 유기적 공동체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와 한 생명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기에 언제나 어디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호흡하며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와 거룩함과 진리가 생의 원리로 그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은 한 몸이다.

교회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에나, 어떤 인종이나, 세계 어느 지역이나 상관없이, 한 믿음을 가진 한 생명 공동체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속에 물들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익 집단의 한 부류로 전락한 교회관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정치하는 이들은 교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정치에 실패할 수 있다고 여겨 교회를 자기의 정치에 이용하는 도구로 삼는다. 사업하는 이들은 자기 사업의 이익에 부합하다 여겨 그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속해 있기에, 교회의 구성원이 이 사회 속에 살고 있기에 그런 이용을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외면한 채 교회를 이용만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거룩에 있다. 오늘날 교회의 교회됨이실되는 가장 큰 원인은 거룩을 저버림에 있다. 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거룩을 상실할 때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생명은 거룩이며,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거룩한 백성(성도)인 것이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시금석은 거룩에 있다. 세상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되며, 모든 우상과 구별됨이 교회의 표식이다. 교회의 표지는 그리스도의 거룩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거룩을 훼방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하고 정결케 함에서 시작된다.


교회의 본질이 거룩이란 점에서 교회는 필연코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 현금의 교회가 개독교 소리를 듣는 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권징이 시행되지 못함에 있다. 교회는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에 전투적인 특성을 가진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투쟁하는 강력한 군대와도 같다. 교회가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권하고 징계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가장 사소한 죄에서부터 심각한 죄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권징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함에 필수적이다. 단순하게 외면적으로 드러난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숨은 부끄러움까지라도 합당하게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 권징이 없는 교회는 벌써 교회되기를 멈춘, 호흡이 정지된 죽은 교회이니,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하여 거룩을 지키려 할 때 필연적으로 권징이 뒤따라야 하고,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적인 특성을 갖는다. 어떤 정치를 표방하든 교회는 정치적이다. 어떤 형태의 조직을 갖추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규범을 가진다. 권징의 합당한 시행을 위하여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 정치 제도의 직임에 소명된 자들은 합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지키며 나타내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 직분 자체에 교회의 거룩을 수호함을 필연적 과제로 받는다.


교회의 직분 중에 항존직은 그 직분자의 항존이 아니고 직분 자체의 항존임을 유념해야 한다. 직임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고, 임의의 직분 남용에는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폐단 가운데 심각한 것은 직분자들의 직분 남용이다. 받은 바 직분의 본래의 목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지키며 나타내는데 전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금의 교회(유형 교회의 형태)에서 한 몸 됨의 표식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다들 자기가 출석하는 지교회만을 생각하고 범우주적인 연합체로서의 교회관을 생각하는 데는 박약하기 그지없다.


조직체로서 대형교회를 이룸에 반대할 뜻은 없다. 대형교회는 나름대로 작은 규모의 교회가 이루지 못하는 큰일들을 해낼 수 있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현재 한국의 교회 실태는 다수의 도시 미자립 개척교회와 농어촌 산간벽지의 교회들이 있어서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절대빈곤층에 속해 있다. 교회가 한 몸이라면 그럴 수 있는가? 교회의 여러 교파에로의 분열은 교회의 하나 됨을 깨트린 주범이다. 범죄함인 것이다. 범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다. 다들 자기 교파를 세운 데 있어서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가 이렇게 분파로 나뉘므로 무자격 목회자가 양산되었고, 권징이 사라졌다. 출석하는 교회에서 권징을 했더라도 교회를 옮겨가면 다 받아준다. 그러니 권징을 무효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권징이 효력을 상실케 된다.


장로교회 제도 하에서 교회의 개척은 노회의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목사의 책임이 됐는지 기이한 일이다. 제도적으로야 노회가 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교회 개척을 노회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일이 과연 있는가? 교회의 개척은 목사의 역량, 그것도 재정적 부담에 있어서 목사의 사비를 충당해야 하는 현실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일이다. 유형 교회의 유지와 부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헌금이다. 헌금의 목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성도들의 삶을 평균케 하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남음이 없게 하는 것, 부한 자나 빈한한 자가 함께 삶을 영위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은 헌금을 바로 사용함에 있다. 마찬가지로 여유가 있는 교회는 빈한한 교회를 돌보아야 마땅하다. 대형교회가 큰일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상을 많이 주시고, 개척 미자립교회가 일을 못했다고 공훈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한 몸인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있는 교회는 마땅히 서로를 돌아볼 눈이 있어야 한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 교회를 돌봄이 없이 어찌 한 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과거 우리 한국교회는 아주 훌륭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십일조 상납 제도이다. 한국 교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잘 하는 것 또한 아주 훌륭한 신앙유산이다. 십일조를 무슨 율법주의라 해서 배격하는 것은 모순이다. 복음의 자유함으로 인한 헌금이라면 십일조만이 아니라 십의 구조도 드려야 마땅하다. 각 지교회가 상회에 드리는 십일조 상납금으로 인하여 상회가 운영되며 각종 큰 사업들을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게 하는 아주 유용한 제도이다. 그런데 오늘날 각 교파들의 제도 운영에 있어 이렇게 합당하게 십일조 상납을 시행하고 있는 교단이 몇이나 될까? 오래전부터 목회 일선에서 노회와 총회의 운영을 보아 왔지만 합당하게 이 제도를 시행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덩치가 큰 대형교회일수록 십일조 상납을 더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고, 마치 그렇게 십일조 상납하는 것으로 하여 기득권이나 정치적인 자격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경우는 많이 보았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시급히 이런 훌륭한 제도적 유산들을 합당하게 시행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장로교회 제도 중에 위임목사라는 것이 있다. 임시목사와 위임목사로 청빙 하는 제도이다. 임시목사란 말 그대로 임시로 1년 동안 시무권을 주어 목회하게 하는 청빙 제도이다. 해당 교회가 목사를 청빙 하는 데 있어서 목사의 자격 유무나 자질에 대한 검증을 다 할 수 없기에 노회가 목사를 지교회에 파송하게 되는데, 이때 해당 지교회는 노회가 파송해 준 목사를 담임목사로 받는 데 있어서 1년 동안의 검증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당 목사가 지교회에 목회자로 합당한 지의 여부를 따져서 다음 청빙 시에 위임목사로 받을 것인지 아니면 해임할 것인지를 살피는 제도이다. 제도 자체는 아주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의미를 그대로 잘 지켜지는 교회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임시 목사직은 1년직이기 때문에 해당 기간이 만료되었을 경우 다시 신임을 물어야 하고 2회를 넘기지 못한다. 2년 차에 신임을 받지 못했을 경우 해당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에 따라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대개의 경우 담임목사로 청빙 되었을 경우 수 삼 년 혹은 최소 5년 이상 시무한 다음에 신임을 물으라고 선배 목사님들의 권고를 자주 들었다. 보통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조용히 목회만 잘하면 되니 긁어서 부스럼 낼 필요가 없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위임목사 제도가 과연 타당한가? 위임이라는 것은 그 교회에서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목회하겠다고 서약하게 하고 지교회의 성도들은 그 목회자의 일생동안 모시겠다고 서약하는 제도이다. 과연 이 제도를 따라 그대로 시행하는 교회가 몇이나 될까? 물론 많은 교회들이 이 제도를 따르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교회들에서 위임한 목회지를 떠나가는 목회자도 있고, 위임된 목회자를 내보내는 교회도 허다하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제도와 현실의 모순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목사로 하여금 목회를 소신 있게 하도록 기회를 주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좋은 교회가 좋은 목회자를 만들고, 좋은 목회자가 좋은 교회를 만든다. 한국교회가 좋은 토양의 목회자와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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