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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Feb 20. 2018

언약- 축복인가 저주인가?

선악과와 생명과/타락/심판/약속

창 2:4-25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의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 금하셨다. 사람은 선악과를 통한 순종의 시험으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도록 작정되었다. 선악과 자체에 죽음에 이르는 어떤 힘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렇게 작정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영생이며 불순종이 사망이다. 죽음은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됨이다. 선악과 금령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생명과로 표상된 영원한 생명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함으로 생명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 종국엔 생명과를 언제나 먹을 수 있는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다.     


  아담의 독처함이 좋지 않다 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셨다.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다. 아담은 도움을 받을 자요, 여자는 돕는 배필이다. 남자는 도움을 받을 존재이며,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이다. 이렇게 부부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남자의 머리의 한 부분도 아니고, 발바닥의 한 부분이 아닌 옆구리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지으신 것이다.     


  아담이 처음 여자를 보며 고백한 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여자가 자신과 한 몸인 것을 고백함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룸이 창조의 질서이다. 남자아이가 장성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함이 창조의 질서이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둘 사이에 감추고 숨길만한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었음을 말한다. 아직 죄가 없었을 때이기에 둘 사이에 숨은 부끄러움도 없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인류가 어떻게 화합할 것인지, 인류의 생이 어떤 삶에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주고 들여다볼 수 있는 관계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유무상통으로 누구도 자기를 주장함이 없이 서로를 나눈 모습에서 성취됨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서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나눌 수 있는 상태로 이루어진다. 단순히 물질로만 소통함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지어진 인류가 함께 영으로 소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한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담의 지혜가 놀랍다. 이름은 그 이름 붙여진 것의 본성과 생의 목표를 담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그들의 본성과 생의 목적이 그 이름에 새겨졌다. 하나님 지식은 한 번의 지식활동으로 사물의 본성과 목적을 다 아신다. 피조물의 지식활동은 누적적이며 가변적이다. 사람의 지식은 반복학습을 통해서 축적되므로 향상되지만 불변하는 것이 아닌 가변성을 갖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만큼은 아니나, 그 피조물 수준에서이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현저히 월등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지식으로 아담은 다른 조물들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하나님의 창조에 하나님을 대리하여 통치하는 왕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하게 한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명령하시는 하나님과 그 명령을 받드는 사람 :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는 허락되었으나 선악과는 금지되었다. 이 금지 명령은 순종과 불순종으로 그 결과가 분명히 제시된다. 순종의 결과는 영생이나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다.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산 자의 세계와 단절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으로 야기되는 영원한 죽음을 뜻한다. 생명과 죽음이 갈리는 시금석은 순종 여부에 달려 있다. 선악과 자체에 선악을 결정짓는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통하여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정하셨기에 생명과 죽음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순종의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생에 이르도록 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기계적인 순종이 아닌 자기의 인격적 의지로 자발적인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 원하셨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따라 온전한 믿음의 순종에 이르러 가야만 했다.     


  에덴의 모든 것이 허락되었으나 단 한 가지 금지 명령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인자와 호의가 얼마나 큰가! 그 많은 것들을 다 베푸셨고 그중에 하나 금하시고 순종할 때 영생이 주어질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악과 금령은 사람을 벌주기 위하여 작정된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려고 주신 약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명령인 것이다.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가 없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창조의 완성을 향하여 시간 내에서 일하심이 창조의 경륜이고 작정이다. 영원 전에 삼위의 협약으로 진행된 이 은혜의 일에 사람은 자발적이고도 온전한 믿음의 순종을 바쳐 드려 영생에 이르러 가야 했다. 창세기 2장의 내용은 3장에서 전개되고 확대 설명된다.         


창 3:1-24    

  뱀은 사람도 아닌데 말을 한다. 그리고 사람을 유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다.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참인 것처럼 한다. 그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 뱀은 첫 등장부터 그 이미지가 좋지 않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다. 성경 곳곳에서 이 뱀은 부정적인 대상이다. 악의 화신이다. 거짓의 아비이다. 이 뱀은 사탄 마귀이다. 그 뱀이 여자에게 와서 거짓으로 미혹한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되는 불변의 말씀이다. 거역하면 죽는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서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지 아닌지 시험해 보라고 유혹했다.  뱀의 미혹하는 말에 여자는 속았다.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셨기에 먹지 말라 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뱀의 거짓된 말이다.     

 

눈이 밝아져 - 하나님과 같이 되어 - 선악을 안다. 

선악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결정이 선이고 악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을 넘어설 존재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선악의 결정권을 넘본 것이 죄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것이 타락이고 불순종이며 죄이다. 그 죄의 삯은 죽음이다.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그 남편에게 주니 그도 먹었다. 여자를 다스릴 자인 남자가 그 죄에 동참했다. 여자가 죄의 일선에 서 있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남자가 최종 결정을 했고 그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죄가 창조에 들어왔다. 그 죄로 말미암아 눈이 밝아졌다. 사람에게 없던 지혜가 생겨났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하나님을 대항하는 지혜이다. 이것은 어두움이다. 이렇게 사람이 얻은 지혜는 빛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 밝아진 눈에 비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필연적 결과물이다. 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벌거벗은 부끄러움이다.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아무 부끄러움이 없었다. 거리낌이 없던 상태가 거리끼는 것으로 변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된 본성이 나타나므로 그것은 서로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서로에게 거울처럼 드러나 비추이게 되어 있다. 사람의 영이 그것을 안다.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보는 것이 좋지 않다. 모두가 죄로 말미암아 결과한 악이다.    


   죄의 일차적 특성은 부끄러움이고 그 결과 숨는 것이다. 죄를 감추기 급급하여 숨는다. 사람은 서로 벌거벗음에 부끄러워 똑바로 바라볼 수 없고 그러므로 감추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사람의 최초 패션은 죄를 가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죄를 가리려 했지만 가릴 수가 없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가릴 수가 없었다.    


  범죄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신다. 도무지 숨을 수 없는 존재가 숨었다. 숨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셨다. 그리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죄에 대한 책망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또한 그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르시는 은혜를 생각하게 한다. 범죄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설 수 없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두려움이 앞선다. 죄에는 형벌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로 성립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거역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는 것은 죄에 따른 심판이 기다리는 것이기에 두려움이 앞선다. 죄의 특성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피하여 숨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고 숨어도 모두 드러나며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창 3:1-24    

  사람은 인격적 존재이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 존재이다.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람의 행위는 생각의 결과이다. 생각은 인격적 결정이다. 첫 사람 아담의 행위는 인격적 결정이며 그 결정을 실행한 행위에는 반드시 도덕적 책임이 뒤따른다. 창조에서 인격적이며 도덕적인 행위의 결과를 책임지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사람이 얼마나 존귀하게 지음 받았는지를 반증하는 사실이다. 행위의 원인과 과정으로 나타난 결과는 분명한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은 아담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범죄 하도록 유혹한 자는 뱀이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당한 아담과 하와에게는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으시지만 뱀에게는 묻지 아니하시고 곧바로 죄에 대한 형벌을 선고하신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는 자기 책임을 시인하는 것보다 회피하고 핑계를 대어 자기 행위가 정당한 것처럼 항변하고 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죄를 짓게 한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자기를 유혹한 자에게 있다고 떠넘기고 있다. 죄의 특성은 죄를 시인하지 않고 회피하며 핑계를 댄다.     


   아담/남자는 하나님의 창조에 왕적인 존재이다. 모든 행위의 책임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결과한 사실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신다. 아담은 책임자로서 그 행위에 대한 합당한 시인과 용서를 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시인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전가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여자"가 내게 유혹하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은근히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떠넘기고 있다. 하와 역시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하여 아담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대답을 하고 있다. 뱀이 유혹하므로 먹었다고 하였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죄는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범죄 이후 두려움으로 피하여 숨었을 뿐만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고 핑계하며 변명을 만들어 내기에 급급하였다. 죄아래 사는 인생의 악한 모습은 언제나 동일하다.    


  죄로 말미암은 결과는 형벌이다.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도록 하였다. 실제로 뱀이 흙을 먹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뱀이 받은 저주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땅에 기어 다니며 흙을 먹으며 사는 것이다.  뱀에게 내린 저주의 선포 속에 타락한 창조를 향한 회복의 말씀이 함께 주어진다. 이것이 원시복음이다. 저주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선포된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원수 관계 속에 암시된 구원과 회복의 약속이 주어진다.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뱀/사탄의 모든 권세가 깨트려질 것이다. 십자가에서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저주의 죽음이 끝날 것이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는 선고가 내려진다. 죄가 없었을지라도 여자에게는 해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해산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은혜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고통 없는 해산인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자녀를 생산하는 축복된 일이 고통의 과정이 되었다. 생육하고 번성함이 하나님의 복 주심이다. 이 축복의 과정이 죄로 말미암은 저주로 인하여 고통의 과정으로 변하였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어야 온전한 존재이다. 남자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을 섬김에로 나아갈 때 여자는 인격의 완성을 본다. 여자는 남자에게 매임으로 그 생명이 풍성해지고 완성에 이른다. 죄가 없을 때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수치나 굴종이 아닌 자발적이고 충족한 상태에서 서로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다스림과 복종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평강의 관계였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이 근본적 질서가 깨어졌다.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나 마음에 차지 않아 늘 서운해하고 남자를 소유하려 하나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남자로 채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남자의 다스림 아래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은 더욱 반항심 가득한 굴종이 되어 불만으로 가득하게 된다. 아담의 책무는 가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가족의 밥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여 그 생명을 존속하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여 생명이 흘러오게 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의 근본은 하나님께 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계속 흘러오도록 하는 것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이다. 아담이 받은 형벌은 땅의 소산을 땀 흘려 수고해야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땅도 저주를 받았다. 자연스럽게 생산되던 식물의 소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여 합당한 소산물을 생산하지 않게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존속해야 할 아담이 생계를 지켜 주기에는 너무도 고된 노동과 땀 흘리는 수고가 필요하게 되었다. 아담은 죽는 날까지 땅의 반항과 거역을 보며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범한 죄가 무엇인지를 맛보았다. 흙에서 지어진 자가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수고로이 일하며 살게 되었다.     


 창 3:1-24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이 찾으시고 부르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로 말미암아 즉각적인 죽음이 와야 맞지만 형의 집행이 유예되었다. 형벌이 면제된 것이 아니고 유보되었다. 여전히 죄 아래 머물러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은 마주 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창조를 향한 경륜을 중단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출발된 시초에 발생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훼방을 만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경륜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신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생산하시고 그 백성의 온전한 섬김을 받으시는 나라를 이루심이다.     


  죄가 발생한 창조에서 죄를 제거하시는 일을 시작하신다. 그 시작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엿볼 수 있다. 죄를 가릴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설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심이다. 인류 최초의 패션 가죽옷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증표이다. 육체의 연약함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계속해서 임하심에 대한 보증이다.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하여 동물이 희생되었다. 여기에서 희생을 통한 속상의 의미를 생각할 수도 있다. 죄에 대한 대가로 고통이 왔고 고통의 끝은 죽음이다.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온갖 악에 대하여 가죽옷은 덮고 가리어 줌으로써 죄를 씻어 내는 일에 희생이 따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과 회복의 약정이 타락한 인류에게 주어졌다.    


  범죄한 사람은 에덴에 머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사람을 추방하셨다. 에덴은 성전의 구조를 갖는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는 곳이다. 성전의 일차적 기능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특별히 만나는 곳이 에덴이다. 에덴이 그 자체로도 낙원이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곳이기에 성전의 구조를 갖는다. 구약에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들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을 구비하는 것이다. 거룩을 위하여 정결 예법대로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대제사장으로 제한되었고 그도 특별한 정결 예식을 행한 후에 희생제물을 들고 나아가야만 했다. 죄인으로서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설 수 없음을 분명히 보이신다. 그러므로 범죄한 사람은 에덴에 머물 수가 없어 추방되었다.    


  에덴에서 추방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이 선악을 하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악을 결정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선악을 결정하는 것을 사람이 스스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는 반역이다. 물론 그 본질은 죄이다. 죄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반역이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을 거역하고 사람이 스스로 모든 생의 방식을 결정하고 시행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그 생명나무의 열매 자체에 무슨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그 열매를 먹음으로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질서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생명을 계속해서 공급받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케 하시는 힘을 공급 받음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런데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었고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할 생명선이 단절되었다. 이것이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서 추방하여 땅을 수고로이 경작함으로 그 생명을 유지되게 하셨다. 그리고 에덴을 넘볼 수 없도록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지키게 하셨다. 사람은 영원히 살 존재로 지음 받았으나 죄 때문에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영원을 사모하여 에덴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결국은 영원한 죽음에 이른다. 이것이 사람에게 임한 비참함이다. 육체만 죽는 것이 아니고 그 영이 죽음에 이른다. 생명의 근본인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된 것이다. 에덴에서 추방된 사람은 고통 속에서 땅을 경작하며 살았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소망 가운데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을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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