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1-26
범죄 후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삶이 기록된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생명이 유지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계속 진행되는 길이 끊어진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세상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다. 그 죽음의 땅에서 아담은 후손을 생산한다. 죽음뿐인 세상에서 후손을 본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보는 것이다. 아담은 자녀를 낳을 때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보며 기뻐했다. 죽음뿐인 세상에서 여인의 후손을 통해 오실 구원자를 바라본 것이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단순한 후손을 본 것이 아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다. 후손을 생산하는 것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일이다. 아담은 그렇게 얻은 후손을 바라볼 때마다 죽음뿐인 저주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보았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사람은 생명을 일으킬 수 없다. 범죄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죄뿐이다. 그 결과는 영원한 죽음이다. 죽음의 세상에서 후손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다. 죽음의 세상에 새 생명을 여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사람 편에서 바라보았을 때 기적이다. 하나님이 이루신 기적이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사람의 죄악 된 모습이다. 사람에게 깊이 뿌리내린 죄악의 결과를 알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은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께 제사/예배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제사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또한 열려있음을 보는 것은,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을 소망할 수 있는 한 가닥 생명줄이다. 그 제사를 드림에 있어 가인과 아벨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발생했을 때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으리라. 죄가 시작된 세상에서 그 죄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자세한 설명이 없이 그냥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가인의 제물이 농산물이었고 아벨의 제물은 짐승이었다는 말에서 무슨 피 흘린 희생까지 언급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생각인 것 같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제물의 형태 때문에 제사를 받고 안 받고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 제사하는 자의 중심을 보신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벨을 증오하여 살인을 하게 된다. 아벨만 없었다면 자기의 제사가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상대적 평가를 해서 다른 대상이 없었다면, 오직 자기 혼자만 그렇게 제사를 하였다면, 자기의 제사가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가 드린 제사가 마음에도 없는,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제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참된 예배의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이, 참된 믿음의 예배를 드린 다른 사람을 인해서 자신의 예배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것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과 같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자신의 죄에 대해 더 발전된 모습으로 핑계를 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냥 핑계를 대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살인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 악행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죄에 대해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죄를 숨기기 위하여 다른 모든 선한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범죄 하면 그 죄의 모습이 자기 밖에, 자기의 얼굴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죄는 숨기려 해도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가인이 범죄 한 뒤 그의 얼굴에 죄의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범죄가 형성되는 시초에 벌써 얼굴에 나타나고 있다. 죄가 행동으로 표출되기 이전에 마음에 자리 잡았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므로 분이 가득하였고 안색이 변했다. 변한 안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돌이키려 하거나 죄를 자복함이 없다. 오히려 죄가 발전하고 분노가 분출된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살인을 행한다.
죄는 항상 사람의 마음 문 밖에 엎드려 있다. 죄가 들어오는 길목에서 마음으로 들어오기를 요구한다. 아무리 그러해도 사람이 그 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가 더 이상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인은 그 죄를 방치하였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행하였다. 살인은 그가 마음에 분을 품을 때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가인은 들에서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죄를 다스려야 할 자가 죄의 종이 되었다. 범죄한 인류의 비참함이다.
범죄한 자는 죄를 숨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감추려 하고 핑계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죽음에 대하여 가인에게 물으신다. 가인의 답변은 정직하지 못하다. 핑계하며 오히려 모르쇠로 일관한다. 오히려 반발하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항변한다.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다. 무고한 생명이 끊어지면 자연도 그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께로 신원을 요구한다. 살인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선고된다. 무고한 피를 흘려 땅을 적셨으니 그 땅이 가인에게 소산물을 주지 않게 되었다. 가인은 땅을 경작하여 소산물을 얻어 살 수 없게 되었다. 땀 흘려 일하여 땅에서 얻은 소산물로 생명을 유지함이 타락한 창조의 법칙이다. 가인에게는 그 법칙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저주에서 저주에로 나아간 모습이다. 죽음의 저주 가운데 살며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소망을 붙들고 살았던 아담의 후손들에게 땅의 소산물로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복이었다. 그러나 살인자 가인에게는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가인은 생명을 해하고 거친 들에서 유리방황하며 끊임없이 남의 생명을 탐하며 살아야 했다. 남의 생명을 탐하는 것이니 끝없는 긴장과 두려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가인은 자기에게 떨어진 죄의 형벌이 엄중함을 깨달았다. 너무도 두려운 앞날에 대하여 공포에 질려 하나님께 탄원한다. 이런 죄의 저주 아래 유리방황할 때에 자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가 살아야 할 생의 방식이 남을 해하므로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니 그를 만나는 어느 누가 그를 선히 대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만인을 적대하여 선다고 리바이어던에서 토마스 홉스가 말했던 것과 같다. 가인은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든 대적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 보호를 요청한다.
가인이 하나님께 받은 표식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가인을 만나면 단번에 그 표식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인 자에게는 가인보다 칠 배나 더한 벌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선고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어느 누가 가인 보다 더한 징벌을 받고 싶겠는가!
그러나 참 황당하게도 가인보다 더한 인물이 기록된다. 가인이 받을 형벌 보다 더욱 과장되이 표현하여 칠십칠 배가 되리라고 입에 담지 못할 죄악을 스스럼없이 토해 놓는 라멕의 등장이다. 이것은 인류 안에 들어온 죄악이 얼마나 발전하고 극악하게 변모해 가는 지를 잘 보여준다.
가인의 살인에 대한 기록을 대할 때마다 끔찍한 참상으로 가슴이 떨린다. 이런 기록을 읽을 때마다 사람은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것이 죄 아래 사는 인생의 필연적 결과이다. 사람은 누구나 속 깊은 곳에 가인의 범죄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가인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인 것이다. 그것은 라멕의 모습을 통해 확인된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해를 가한 소년을 죽인다. 살인의 극대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자신에게 해를 가한 자에게 살인으로 보복한다. 그리고 가인이 살인에 대해 저주를 받고 그를 죽이는 자에게는 가인보다도 벌을 칠 배나 더 받으리라 한 것에 보태어 자신을 위해서는 칠십칠 배나 될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칠 배, 혹은 칠십칠 배라는 것은 꼭 그 수치에 맞는 형벌을 뜻하기보다는, 7과 77이라는 완벽한 숫자의 상징을 통해 보복이 완벽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렇게 77배를 언급하는 라멕의 말은, 자기의 죄를 극대화시키고 자랑하는 모습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가인의 살인보다도 훨씬 강화된 죄의 모습을 보인다.
범죄 후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은 후손들을 낳으며 생육과 번성을 한다. 그 후손들 가운데서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창조적인 모습으로 문화를 개발하고 인류가 번성해 간다. 그렇게 인류가 생육하며 번성해 가는 곳에 범죄한 죄의 특성들과 함께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진행된다. 타락한 창조가 함께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만 창조세계가 여전히 보존되고 발전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역사가 함께 진행됨을 볼 수 있다. 죄악된 방식이지만 여전히 창조는 보존되고 발전된다. 자연만물도,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유지 발전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 다른 아들을 주신다. 믿음의 순종을 드린 아벨은 죽었고 가인은 범죄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에 하나님의 나라를 진행할 후사가 단절될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후사가 주어진다. 셋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또다시 이어지고 진행됨을 본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여인의 후사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 반복됨을 본다. 하나님의 구원이다. 사람에게서 출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구속의 약속이 진행된다.
육의 자손 가인은 살인이라는 극대화된 범죄의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지를 보여 준다. 영의 방식으로 살았던 아벨은 죽었다. 영의 후사로 지목된 셋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계속됨을 보이신다. 육의 후손과 영의 후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시초 인류의 역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대립과 긴장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영의 방식, 믿음으로 사는 자의 후손으로 셋의 아들 에노스가 언급된다. 에노스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음을 뜻한다. 에노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택한 자 안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그늘에서 방황하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중단됨이 없이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