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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Mar 21. 2018

심판과 구원

창 6:1-9:17

  여호와의 영이 떠나간 육의 사람,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 노아를 말함으로 극에 달한 세상의 죄와 그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땅 위에 사람이 번성한다. 사람의 번성은 죄가 더 왕성해지고 발전된 양태로 전개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의 방식으로 번성함은 하나님을 거스름의 증대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들, 곧 영으로 사는 자들이다. 영으로 살도록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육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육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갔다. 유혹을 받은 것이다. 영으로 살아야 할 자가 육의 방식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타락한 인류 안에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셨다. 그것 자체로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타락한 세상을 붙드심으로 영으로 함께 하시고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시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방식으로 사는 길을 포기하고 육의 방식으로 사는 자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떠나가셨다. 영으로 살아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할 자들이 육이 되므로 하나님의 영이 떠났고 그러므로 그들의 생은 육체로 사는 120년으로 한정되었다. 여호와의 영으로 살아 천수를 누리던 자들이 이제 120년으로 생이 한정되었다.     


  네피림, 용사로 명성을 떨칠 만큼 탁월한 사람들로 살았지만 그들은 다 범죄한 육의 방식에로 나아가므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신다. 이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 방식으로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후회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말씀하신다.    


  모두가 타락한 세상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보이신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한다. 범죄한 인류의 후손으로서 완전한 사람은 없다. 노아를 완전하다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하신다. 노아는 이 모든 일을 다 준행하였다. 믿음으로 순종한 것이다. 이것이 노아의 의이고 완전함이다. 하나님의 명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였다. 믿음의 순종이 사람의 생명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종만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의로움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노아를 의인되게 하였고 온전케 하였다.    


  심판의 홍수 가운데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구원을 받았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상징이 되었다. 심판의 홍수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는 설 자리가 없다. 홍수로 온 땅이 물로 뒤덮였다. 구원의 방주 안에서 노아와 함께한 가족들은 하나님의 엄위로우심과 구원의 은혜를 동시에 맛보았다.    


  홍수가 지나가고 땅에 덮였던 물이 빠진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여호와께 번제를 드린다. 번제의 향기를 받으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새언약을 주신다. 그것은 이미 주신 언약의 반복이며 확장이다.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1-22)    


  홍수로 인하여 사람의 거소인 지구의 환경이 격변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단축되어 120년에 한정되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눈에 격변한 환경은 너무도 큰 두려움과 절망을 주는 것이었으리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환경에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미래를 확증해 주신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의 방식이 중단되지 않고 변함없이 진행될 것이다. 추위와 더위, 계절의 변화, 낮과 밤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을 노아에게 주신 크나큰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이다.    


  아담에게 주셨던 복이 노아에게 다시 반복된다. 아담이 처음 인류의 머리라면, 노아 역시 홍수에서 살아남은 새 인류의 머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대표자와 맺으시는 언약의 말씀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과 번성 그리고 온 땅에 충만하여 온전한 다스림 가운데 하나님께로 완성된 창조를 이루어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모든 짐승과 생물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파괴된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말씀이다. 홍수로 인하여 파괴된 생태계에서 동물도 죽고 죽이는 먹이사슬 관계로 생존한다. 그런 세상에서 노아는 짐승들에게서도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창조를 다스리는 자로 세워진 사람의 존재 의미를 분명하게 확정하여 말씀으로 주신다. 사람은 모든 생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생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하셨다.     

  홍수 이전에는 채소와 과일이 식물이었다. 그러나 홍수가 와서 식물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홍수 이후에 동물을 식물로 허락하신다. 육식이 생존의 보조 식물로 주어진다. 그러나 사람의 주된 식물은 채소와 과일이었다. 동물이 식물로 주어졌지만 피채 먹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이 함께 주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에덴에서 모든 것이 허락되었지만 선악과는 금지했던 것과 비교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과 금지하신 것에 대한 사람의 믿음의 순종 여부를 물으시는 것은 아닐까?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홍수로 인한 큰 두려움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빗방울만 떨어져도 큰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의 무지개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비가 개인 뒤에 떠오른 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노아홍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히 보이셨다. 첫 심판은 완전한 미래의 심판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에서 노아홍수 보다도 더 완전한 심판이 확정되어 실현될 것이다. 홍수심판 때에 노아와 그 가족들이 선택되어 구원받았던 것처럼, 장차 오는 영원한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도 온전한 구원이 주어질 것이다.    


  홍수심판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큰 경고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러나 그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은 징계와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선택과 유기의 신비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버릴 자들을 영원한 징계로 버리시고, 택한 자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    


  심판과 구원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약정으로 선포된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심판과 구원을 바라본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언제나 이 약속의 말씀이 큰 힘이며 위로가 된다. 죄악이 깊어질수록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견고히 붙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처음 인류가 홍수 심판으로 다 죽었다. 노아와 함께 그의 식구들만 살아남았다.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노아 또한 새 인류의 머리로 세워졌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노아는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자로 세워졌다. 노아 자신의 행위가 선했다거나 온전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것은 20절 이하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보다 분명히 밝혀진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하여 온 땅에 사람들이 퍼졌다. 그들은 홍수 이후에 새로운 인류의 머리였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창조를 개발하고 다스리며 번성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야만 했다.     

  홍수 이전에 사람들을 꿰뚫어 아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홍수심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홍수심판으로도 사람은 홍수 이전과 비교해서 한 가지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 사람은 출생부터 죄악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다시 구축하셨을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뜻을 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존하셔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 모든 죄악을 멸하시고, 죄인들 중에 일부를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을 통해 온전히 이루실 것이다. 여인의 후손이 오실 길을 마련하시는 예비 과정으로 선택한 몇 사람들을 통하여 구속사는 진행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죄악이 창궐하고 하나님을 거역할 것이다. 각기 제 길로 행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비록 택함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온전치 못하여 자주 넘어지며 죄악된 인간의 모습으로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돌이켜 새롭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구속사를 진행하신다.    


  홍수 이후 노아의 행사를 기록하는데 보기 좋은 모습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모습, 온전히 죄악 가운데서 본능적으로 행하는 악이 그의 가정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했고 벌거벗었는데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것을 보고 밖에 나가 알렸다.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고 누웠다. 수치를 가리지도 아니한 채 무절제한 삶의 모습을 보인다. 새인류의 머리로서 가족의 수장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죄를 품고 사는 인생으로서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불린다. 가나안은 함의 자손 중에 대표자로서 종족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즐기며 떠들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였고 그것을 가려주었다. 그 행위의 결과로 노아로부터 가나안은 저주를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중단되지 아니하고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구속사는 진행된다. 셈은 가나안의 주가 되어 다스릴 자로 지목된다. 가나안을 저주하는데 셈의 종이 되리라 한다. 셈은 온 족속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 지칭한다. 셈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것이다. 셈은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진행할 자이다. 그의 줄기를 타고 여인의 후손이 세상에 오실 것이다.    


  야벳은 셈을 도울 자이다. 야벳을 창대케 하여 셈을 돕게 하신다. 모든 문화와 인류의 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표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답이 나온다. 보이는 현상만 따라 해석하면 곡해하고 잘못하게 된다. 셈과 함과 야벳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고 진행되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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