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삶을 살고 있다는 흔적
방문의료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느낀 점을 정리하다 내 집보다 다른 사람의 냉장고를 더 많이 열어본 생각이 나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방문의료를 진행하다 보면 공통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양과 관련된 식사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식사를 골고루 규칙적으로 하는 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여러 가지 요인으로 식사를 못하고 계신다고들 말씀하신다. 밥과 반찬은 주로 복지관이나 노인복지센터에서 가져다주는 것으로 해결하고 계시고, 그 마저도 운영하지 않는 주말에는 금요일에 가져다준 것으로 이틀을 나누어 드신다고 하셨다. 밥과 반찬이 충분함에도 식사는 못하시는 상황을 줄곧 마주하게 되는데 편마비가 있어 거동이 힘들어 냉장고 앞으로 가지 못한다던지, 냉장고 앞까지는 어떻게 갔지만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집지 못해서 아쉬움을 남긴 채 되돌아오신 분도 계셨다. 요양보호사가 방문해서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요양보호사가 오지 않는 날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요양보호자마저도 오지 않는 날이면 식사를 챙기기는 정말 어렵다고 하셨다.
제일 어려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구강관리가 제대로 안되면 치주염이나 잇몸이 내려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곧 발치로 이어지게 된다. 자연적이든 병리적이든 치아 소실은 어찌할 수 없어 틀니나 임플란트 등의 도움으로 식사를 하게 되는데 틀니는 일상적으로 불편하다 보니 착용을 잘 안 하게 되어 맞지 않게 된다. 통증으로 씹기가 힘드니 식사를 피하게 되고 식사를 하시지 않으니 입맛이 떨어져 식사에 대한 흥미도 같이 떨어지곤 하였다. 그래서 방문의료를 나가 냉장고를 열어보면 평소 식습관이나 생활을 대신 말해주곤 했었다.
사실 처음에는 냉장고를 열어보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어 코디네이터 교육에서 ‘냉장고를 열어보다’라는 강의를 재밌게 듣게 되었고 실제로 방문의료를 나가게 되면 실천해보고자 했었다. 그리고 첫 방문의료를 나간 날, 충분히 양해를 구하고 냉장고를 열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냉장고를 열어보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고 너무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그 계기로 냉장고를 여는 것에 동의만 잘 얻고 열어보는데 두려움은 극복했다. 첫 집의 냉장고를 열어본 순간이었다.
텅텅.
처음 냉장고를 열어본 날, 텅텅 빈 냉장고를 보고서는 무엇을 드시고 지내지는지 궁금했다. 냉장고에 왜 아무것도 없는지 여쭈니 거동이 불편하니 반찬을 할 수가 없고 반찬을 하고자 하니 장을 보러 나가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질문을 해놓고도 질문을 한 나에게 당황스러워서 진땀을 빼곤 했다. 너무 당연한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반찬 몇 가지가 반찬통에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복지관에서 가져다준 반찬이거나 요양보호사가 해놓고 간 반찬이라고 하셨다. 반찬 몇 가지도 김치나 장류, 담금류 종류가 대다수였고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잘 상하지 않는 것이었다. 누구나 내 집에서 맛있는 것을 맛보며 편안하게 지내기 원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방문의료로 방문하는 집들은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이 만성질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데 혈압약을 복용하고 있더라도 혈압이 치솟아 있는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냉장고 속에 반찬은 대부분 나트륨이 많아서 딱 봐도 혈압이 있으면 좋지 않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나 여름철에는 음식이 상하기 쉽고 반찬으로 먹는 양이 많지 않으니 짠 것들이 보관하기 편리하겠지만 건강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들이 좀 더 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짠 음식을 자주 접해도 나트륨을 배출해 줄 수 있는 음식도 함께 섭취해도 좋을 방법이지만 재료를 구매하고 또 조리할 수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상황도 아쉬웠다.
첫 냉장고 열어보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냉장고 열어보기 프로젝트는 계속되었다.
요약해서 보면, '텅텅형'이 제일 많았고 '꽉꽉형', '소비기한 만료형', '나이스형'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먼저 텅텅형은 앞에 글과 같이 아무것도 없거나 반찬이 몇 개 되지 않는 유형의 냉장고이다. 꽉꽉형은 무엇이든 냉장고 직행을 뜻하는 유형이다. 치과용 덴탈 얼음찜질팩부터 안약, 인슐린, 옆집에서 가져다준 김치, 복지관에서 가져다준 김치, 다양한 진액이 담긴 병들, 된장, 쌈장, 고추장까지 없는 게 냉장고를 열자마자 쏟아질까 겁나는 냉장고 유형이다. 꽉 찬 냉장고도 다양한 재료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식사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리를 하려고 해도 재료가 없어하기 힘든 유형의 냉장고가 많았다. 그래서 꽉꽉 유형의 냉장고도 점수를 매긴다면 낮은 점수에 해당한다.
소비기한 만료형 냉장고는 그 누구도 알다시피 냉장고에서 조리를 할 수 없는 상태의 재료로 가득한 냉장고 유형이다. 이 냉장고는 주로 병원에 입원해서 오랜 기간 집을 비웠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경우, 가족이나 친지의 간병을 받다가 불편해 다시 내 집으로 돌아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장기요양등급으로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지 않아 여쭈어 봤더니 장기요양등급 신청 후 판정대기 중이거나 이 마저도 할 수 없었던 집이 많았다. 만약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더라고 가사를 도와주기는 하지만 냉장고 청소를 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겠지만 냉장고에서 음식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컨디션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이스형! 말 그대로 nice에 해당하는 유형이었다. 신선한 재료가 충분하고 김치와 장류 외에도 영양소가 충분하고 대상자 취향의 음식이 있는 냉장고이다. 냉장고 전체의 1/3 정도로 유지되어 폐기되는 음식도 거의 없어 전반적으로 순환이 잘 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골고루 음식을 섭취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먹기 좋게 발려져 있는 생선, 씹기 편안한 계란말이, 곱게 간 고기로 만든 볶음류 등 손수 만들어진 음식들을 보니 대상자를 매우 생각하는 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유형의 냉장고는 사실 몇 집안 되는데 주로 가족들이 자주 왕래하거나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삶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냉장고에서도 삶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방문의료를 통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