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과 효율성
창의의 반대는 뭘까. 효율이다. 창의적인 만큼 비효율적이고, 비효율적인 만큼 창의적이다. 바둑판의 흑백의 돌처럼 서로의 지분을 갉아먹는 제로섬의 관계다.
가령 군대는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몰아 넣은 경우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군대라는 조직만의 특수한 성격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이나 복장부터, 말투, 먹는 음식, 쓰는 생활용품까지 모든 특수성은 없앤다. 의상디자인과 출신의 이병장이 자신의 스타일을 살리는 것보다 옷으로 적군인지 아군인지, 어느 부대 소속인지를 구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최신 유행어를 섞은 랩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단어만 사용해 들어갈 내용만 담아 전하는 보고가 포탄을 피해 살아 남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둥글게 모여 앉아 애기하다가 나온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도하기에는 병사들의 생명이나 전쟁의 승패는 너무 큰 댓가다. 피라미드 구조로 한 사람이 결정하고 나머지는 지시에만 따르는 것이, 때로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빠르고 실패의 확률이 적다.
효율을 위해 창의는 죽인다. 군대에서 개인적인 것, 다른 것, 기존과 다른 것들은 철저히 삭제한다. 주체성과 개인성도 소멸시킨다. 사람들은 한국의 병영 문화가 구시대적이고 몰개성적이라고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의 이런 특징은 한국만의 특별한 성격은 아니다. 인류는 어떻게 해야 이 조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긴 역사동안 경험해왔고, 군대는 그것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만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외국 영화의 군대 장면에서도 이런 클리셰가 자주 등장한다. 노련한 교육관은 갓 들어온 신병의 얼굴에 침을 튀기며 큰 소리로 "여기서 너는 하찮은 존재고,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그럼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해주겠다. 너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고 소리친다.
효율의 경전은 매뉴얼이다.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고,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다른 것은 터부(Taboo)다. 효율을 해치기 때문이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 한다. 틀을 깨는 것도 효율을 해친다. 생각의 단위는 집단이다. 효율적이려면 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효율은 유지와 관리에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조직이 커질수록 효율이 중요해진다. 효율은 최소 투입과 최대의 산출을 추구한다. 그 의미 자체로 결과 중심적이다. 안정적인 확률을 선호한다. 적은 확률로 대박나기 보단 높은 확률의 평타가 효율적이다. 효율이라는 단어가 보수적, 현실적, 실리적, 집단적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이유다.
효율성은 역사의 어느 순간 강한 유행을 탔다. 훨씬 이전부터 조금씩 그래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생각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나타나는 순간은 근대라고 부르는 시기다. 공장은 포드의 방식으로 굴러갔고, 그 위력은 굉장했다. 자본주의의 확산과 함께 기업뿐 아니라 학교, 행정조직, 심지어 개인의 생활까지도 효율 추구를 미덕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이때 만들어진 조직들이 거대해지면서 효율성은 더 중요해졌다. 모두가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 더 많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사상사, 예술사조에도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효율적인 세상'을 그려 넣었다. 현실을 빠르게 반영하는 게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대가 얼마나 효율성을 강하게 추구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도 산업화 시대에 본격적으로 효율성에 빠져들었다. 잘 살기 위해 최소의 투입과 최대의 산출을 목표로 뛰었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산업 모델이 있었으니 새 그림을 구상할 필요는 없었다. 빠른 길로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만큼 창의보단 효율이 중요했다. 일치단결과 하나됨을 강조했다. 그에 걸맞게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시킨 형태의 이데올로기도 자리잡았다. 부품을 찍어내는 교육과 쉬지 않고 일하는 근면함은 최소 투입으로 최대 산출을 만들기에 적합했다. 그 결과 노벨상 수상자는 배출하지 못했지만,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탄생시킬 수 있었다.
효율은 새로운 것을 만들 때 쓰는 개념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쓰인다. 효율은 동선을 어떻게 짜서 시간 낭비를 줄일 것인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어떻게 나눠서 들이는 힘을 줄일지를 말할 때 쓴다. '효율적으로 요리했다'는 말은 맛있고 훌륭한 음식을 만든 게 아니라 짧은 시간과 적은 재료로 괜찮은 음식을 만들었단 의미에 가깝다. 효율은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진 못한다. 안정적이지만 심심하고 변화가 적다. 효율적인 만큼 역동성이 떨어지고 혁신이 적다.
너도나도 효율을 추구하면 세상에 새로운 것이 줄어든다. 새것이 없으니 주어진 것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블루오션은 없고 레드오션만 있다. 그나마 만들어진 블루오션은 금방 레드오션이 된다. 모두가 블루오션에 목 말라 하는 시점이 오게 마련이다. 전부 효율적이기만 해서 수급이 안 맞다보니 가끔씩 나오는 창의가 귀하다. 수요의 공급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흔한 효율의 사회에서 희귀한 창의는 그 존재가치가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져 '대박 신화'가 되기도 한다. 한쪽 끝에 다다른 진자처럼 효율 추구가 벽을 만나자, 창의에 대한 목마름이 커진 셈이다.
이런 시대에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대박을 노리고 창의적으로 새 것을 만들거나, 창의를 포기하고 효율을 추구해 누군가 만든 새것을 빠르게 추종하거나 잠식해버리면 된다. 전자는 창의적으로 변신해야 하고, 후자는 지속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면 된다. 한국경제를 두고 선진국 반열이 들 것이낙 중진국 함정이 빠질 것인가를 두고 해법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해법이 있다. 하나는 창의를 발굴해서 세계경제를 선도하는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중진국임을 인정하고 더 잘 하는 중진국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든 국가경제이든 전자를 추구하는 게 요즘의 대세다.
군대에서 효율을 위해 창의를 죽인 것처럼, 창의적이려면 효율을 죽이면 된다. 창의적인 도시를 원하면 차들은 다니기 어렵고 빙빙 돌아가는 옛날 골목길이 있으면 된다. 창의적인 여행을 원하면 효율적인 동선과 계획을 짜지 않으면 된다. 사회를 창의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실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조직을 창의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생산성 지표를 포기하면 된다. 더 창의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쓸데 없는 짓을 하도록 놔두면 된다. 빠른 길을 알아도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한다. 비효율적으로 한 분야에 미치거나, 비효율적으로 이것 저것 손 대거나, 비효율적으로 실패를 반복해야 창의가 나온다.
그러니 창의적이기로 했다면 비효율적일 각오를 해야 한다. 안정적이고 관리되면서 창의를 바라는 것은 콩 심고 팥 나길 기다리는 셈이다. 직원의 근태 관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월급이 허투루 쓰이는 것 아닌가 불안해하지 않아야 하고, 투자 단게에서 손익 계산서를 두드리지 않아야 않는 배포가 있어야 가능하다. 실제로 요즘 화제가 되는 창의적인 기업들은 기업문화는 비효율적을 내세운다. 창의성을 내건 자기계발서도 휴식과 놀이를 강조하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이미 효율적인 세상에 익숙해져 있거나, 잃을 것이 많아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한다.
다만 요즘 들어 창의성은, 그 옛날 효율성이 그랬던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미덕으로 여겨진다. 특히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효율은 악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효율을 위해 희생된 것들에 대한 경험이 많아서다. 자신의 몸을 불사른 노동운동가들, 자정 넘어까지 정해진 학원을 돌아야 했던 학창시절, 무의미하고 쳇바퀴 같은 직장생활, 이제는 볼 수 없는 자연환경, 부모의 반대에 헤어진 첫사랑과 같은 것들이다. 효율의 대유행이 오래 지속되면서 오는 피로감도 크다.
그러나 창의는 절대선이 아니다. 창의는 파괴적이다. 인도 신화의 비쉬누 신이다. 창조는 파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부수고, 기존의 것이 부숴져야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창의성에 틀은 없다. 다른 것을 추구하고, 다르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창의다. 그래서 기존의 틀은 깨려고 한다.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쫓는다. 결과보다는 과정이나 목적에 의미를 둔다. 창의의 결과는 극단적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고, 승자독식의 구조다. 그래서 창의는 개혁적, 이상적, 개인적, 역동적이라는 말들과 잘 어울린다.
창조는 익숙한 삶의 문법을 깨뜨리는 반역적 행위에서 나온다. 시대를 거역하는 창조적 정신은 기성의 질서를 흔들기에 그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를 부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 문화의 압박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광기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침놀’에서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어주면서 존중되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은 광기다.”
창의는 선, 효율은 악인것처럼 프레임이 만들어지면 부작용이 생긴다. 수많은 스타트업과 제도권 산업간의 갈등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창의는 누군가에게 악일 수도 있다. 다 창의적일 필요도 없고, 다 창의적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어설프게 창의적인것도 문제다. 효율적으로 창의성을 만들려는 시도도 그렇다. 효율의 극단인 관료제가 창의를 만든다고 하는 발상과, 그게 실패하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우기 위해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IT부서에 신사업 개발과 업무생산성 개선을 동시에 주문하는 경영진도 그렇다.
그냥 대세에 따라 창의성을 부르짖기 전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정말 창의적이어야 하는가, 창의성이 얼마나 필요한가도 고민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