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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미 Heyme Oct 21. 2021

[1] 우울이라는 파도에서 서핑하기

<가끔은 잘 살았는데도 심란하지만,>

올해 여름, 살면서 처음으로 서핑을 배웠다. 희끄무레한 하늘 아래에 아래 유달리 무섭게 파도가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자연의 장엄함 앞에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신나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엇박으로 두둥거렸다. 작은 파도를 찾아 나선 6인용 차 안에서 내 마음은 포세이돈의 행진 북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 이론 강습부터 들었다. 서핑보드를 드는 법, 올라타는 법, 중심 잡는 법, 구조 요청하는 법 등, 파도를 타기 위해 배워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을 하나라도 놓칠 세라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직접 바다에 들어가 보니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속성으로 배웠던 가벼운 서핑 지식은 코로 들어온 바닷물 한 모금에 짜게 소화되어 버렸다. 눈이 번쩍 떠지고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전혀 소용이 없었다.


물속에 풍덩 몸을 담그고, 온전히 몸으로만 배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엎드려서 쉼 없이 손을 움직여주며 멀리 수평선을 보고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 가장 자주 필요했고, 그러다가 작지도, 세지도 않은 좋은 파도를 고르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적당한 파도가 내 등 뒤에 왔다 싶으면 한 번에 팍! 하고 중심을 잡아보았다. 수십 번을 비틀비틀하다가 넘어졌고 또 한 바가지로 물을 먹는 배부른 도돌이표가 이어진다. 어느 순간 이번엔 제발- 하며 디딘 발은 비틀거리기만 하지 넘어지진 않았다. 진짜로 올라탄 것이다.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갈 때 느껴지는 그 쾌감! 아- 잊을 수 없다.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물살과 내가 하나 되는 그 느낌. 비록 대여한 슈트가 더러워서 밤부터 엉덩이에 징그러운 두드러기가 잔뜩 나서 고생하고, 자주 사용하지 않던 어깻죽지와 허벅지 근육이 너무 일을 열심히 한 나머지 파업을 선언해 버렸지만, 그래도 정말 행복했다.




오랫동안 실패하며 비틀거렸던 건 비단 이번 바다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나와 삶이라는 바다에서도 충분하고도 미친 듯이 헤매었다. 어떤 파도가 칠 지 모르는 미지의 바다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갑자기 느낀 10년 전, 그 이후로 내 마음의 파도는 나에게 참 오랜 시간 버거웠다.


밝고 희망찼던 나는 어떤 틀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 틀에 나를 구겨 넣지 못하면 처음엔 부정했고, 다음엔 나든 남이든 붙어서 싸웠다. 내 마음은 원래 그저 지나가며 나를 밀어주던 파도였다. 그런데 왜인지도 모르게, 갑자기 성이 나고 제어가 안 되었다. 어떨 때는 죽일 듯 나를 덮치고 밀치고 고꾸라트렸다. 짠물을 가득 먹어 깊은 바다가 보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잠겨서 참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파도에서 사는 방법을 몸으로 하나하나, 아주 조금씩 익혀야 했다. 한 번 일어서는 게 어려웠지만, 감을 익힌 나는 꽤 오래, 자주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을 즐긴다는 감각을, 친구와 고민을 터놓고 얘기한다는 경험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사하는 방법을, 나를 존중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처음 보는 큰 파도가 쳐 가혹하고 어두운 그 심연은 누구에게나 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파도를 건너는 영법을 익히고 있는 중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깨지고 가라앉는 중에도 그 시절을 살아온, 아니, 살아내고 있는 내가 나를 지켰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 살아내느라 부지런한 이 나를 채근하거나 닦달하지 말자.


우리가 익힌 삶의 영법들은 시기마다, 나의 상태마다  많이 달랐지만, 그때마다  모든 움직임이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고  필요한 영법이었다. 그제는 미친 듯이 두려웠고, 어제는 우울 속에 침전해 있어서   앞도  보이는  같을 지라도.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익혀나갔던  영법들을 익힌  자신을 영영 잊지 않고 다독여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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