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쇼핑몰에서 식사를 하고 입가심을 위해 카페에 갔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가족은 라테, 아이는 케이크를 주문했다. 이윽고 주문벨이 윙윙 울렸다. 나는 잽싸게 주문벨을 잡아챘다. 그리고 음료 픽업 장소로 향했다. 윙윙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나를 보며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직원은 눈웃음을 보였다. 친절한 목소리로 음료를 건네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주문하신 아이스아메리카노, 라테, 케이크 나오셨습니다." 순간 조금 거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이렇게 높임말을 잘 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솔직히 높임말이 어렵긴 하다. 그래서 나도 실수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높임말 실수를 거북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이런 높임말 실수가 과잉친절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잉친절은 무엇일까?
친절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 또는 그런 태도. <네이버 국어사전>
사전에 명시된 것과 같이 친절은 태도가 정겹고 고분고분하다는 뜻이다. 나는 친절의 사전적 의미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중에서 '고분고분'이라는 단어가 매우 거부감이 든다. '고분고분'이라는 단어는 말이나 행동이 공손하고 부드러운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런데 왠지 고분고분이라고 하면 계층감이 느껴지는 단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층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윗사람이 지시하고 아랫사람이 그것을 고분고분하게 따른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고분고분'이라는 단어에 계층감을 느끼고 있어서일까. 나는 친절도 계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단반향 계층 말이다.
친절은 물과 반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친절은 아래서 위로만 향한다. 이때 위는 고객이고 아래는 판매자다. 고객이 갑이고 판매자가 을이 되는 것이다. 갑은 상품을 구매하는 대가로 친절도 제공받는다. 을은 상품을 판매하는 대가로 친절을 제공한다. 반대의 경우는 없다. 내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어떤 매장에 들어가면서 가게 점원에게 "사랑합니다. 점원님. 저는 00 물건을 구매하고 싶어서 방문한 000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것이 친절이 단방향으로 흐른다는 증거이다.
이런 단방향성 특성만으로도 피곤해 보이는 친절이라는 단어의 특징은 '과잉'을 만나 피로의 정점을 찍는다. '과잉'은 남는다는 뜻이다. 과잉친절은 친절이 남을 정도로 넘친다는 뜻이다. 이는 다른 말로 넘쳐흐르는 고분고분함, 넘쳐흐르는 정겨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고분고분함이 넘쳐흐르니 갑인 고객이 어떤 것을 요구하더라도 을인 판매자는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고 참아야 한다. 또 정겨움이 넘쳐흐르니 갑인 고객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까지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과잉친절은 고분고분과 정겨움이 넘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잉친절의 문제는 무엇인가?
과잉친절은 2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 번째는 갑질, 두 번째는 감정소모다. 갑질은 오랜 시간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럼 갑질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내가 생각하는 갑질은 우월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월함이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감정을 말한다. 이런 우월감을 가장 쉽고 빠르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쇼핑이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방문하는 매장마다 넘치는 친절함에 절로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그것이 우월감에 빠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우월감은 곧 자신이 갑에 위치에 있고 점원이 을에 위치에 있다는 인식을 가져온다. 갑과 을의 위치가 정해지면 갑에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을에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편리를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을보다는 갑에 위치에 있는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런 착각이 갑질을 탄생시킨다.
두 번째 문제인 감정소모는 갑질에서 파생된다. 갑질에 휘둘리는 을이 겪는 어려움이 감정소모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한대 쥐어박고 싶게 말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웃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감정소모다. 감정소모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나는 이런 감정소모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이혼율, 낮은 출산율, 가정폭력 등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는 감정소모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가정은 자신의 감정을 서로 공유하고 보듬고 치유하는 사람으로 구성된 따뜻한 장소다. 하지만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감정을 모두 소모해 버린 사람이 가정에서 나눌 수 있는 감정이 남아 있을까. 이런 모습은 비단 직장을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다. 학생, 주부, 어린이 모두에게 해당한다. 가정 구성원 모두가 감정을 다 소진한 상태로 집에 모이는 것이다. 그 결과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것이 감정소모가 야기하는 문제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과잉친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친절의 한자 풀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친절은 친할 친(親), 끊을 절(切) 두 개의 한자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친함을 끊는다는 이상한 말이 된다. 하지만 끊을 절(切)에는 끊다, 베다 이외에도 정성스럽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래서 친절이 '대하는 것이 정성스러운 태도'라는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친절이라는 단어의 진짜 뜻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숨어있는 정성스러움이라는 뜻을 찾아야지만 진짜 친절의 뜻을 찾을 수 있다.
친절이라는 단어의 진짜 뜻을 찾기 위해 숨어 있는 뜻을 찾아야 하는 것과 같이 과잉친절의 문제를 찾기 위해서는 진정한 친절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진정한 친절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를 건네고 그것을 받은 친구는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곤 함께 자기가 좋아하는 소꿉놀이도 하고 친구가 좋아하는 술래잡기도 한다. 이처럼 진정한 친절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친절은 갑을 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다. 수평관계에는 위아래가 없다. 즉, 서로 함께 친절을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다. 어느 한쪽이라도 위에 있거나 아래로 내려가면 수평관계는 깨진다. 친절의 끊을 절이 '정성스럽다'가 아닌 '끊다'가 되는 표면상 친절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단편적이고 휘발적이다. 하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수평관계의 친절은 오래간다. 마음으로 받은 친절을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느끼는 친절은 다시 마음으로 돌려줘야 한다. 그래야 서로 상호적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친절을 받았을 때 그것을 당연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받은 친절을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친절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친절을 돌려주는 것도 쉽다.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것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면 족하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할 것이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분께 나는 '감사드리옵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