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새벽 5시 30분입니다. 둘째가 태어난 지 28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병원과 조리원을 거쳐 집에 온 지는 2주가 지났고요. 감사하게도 2주 동안 건강하게 잘 자라 이제는 어느 정도 생활 주기가 생겼습니다.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신비롭고 경이로움에는 항상 고됨이 따르지요. 저는 4시에 일어나 둘째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나면 지금 시간이 됩니다. 저는 지금 시간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글을 쓰려 노력합니다.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는 둘째의 편안한 꿈나라를 기원하며 글을 쓰지요.
첫째가 신생아 시절에도 1시경에는 아내가 4시경에는 제가 일어나 분유를 먹였습니다. 서로 시간을 나눠 도와주며 저희는 첫째를 키웠죠. 첫째에겐 미안하지만 첫째 때는 빨리 먹이고 빨리 트림시키고 빨리 다시 재우고 저도 출근 전까지 조금이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에 항상 조급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분유를 먹이면서도 '천천히 먹어', '옳지 잘하고 있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고요. 그리고 자거나 숨을 고르려고 분유를 먹지 않는 둘째의 젖병을 톡톡 치며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충분히 호흡을 고르고 다시 힘을 내 분유를 먹을 수 있도록 기다려 줍니다. 트림을 시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분유를 다 먹은가 동시에 들쳐 안고 등을 토닥이기 바빴지만 둘째는 다 먹은 후 어느 정도 안아줍니다. 그리고 둘째의 표정을 보고 편안해졌다고 생각되면 그때 안아서 트림을 시키고 있죠. 그리고 트림이 나오지 않더라도 세워서 안고, 눕혀서 안고를 반복해 가며 트림을 꼭 시키려 노력합니다. 트림을 한 후에는 바로 눕히지 않고 10여분을 다시 안아주는데요. 그럼 아이의 표정이 편안해졌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침대에 눕히죠.
아이는 포근했던 아비의 품을 떠나 침대로 내려감을 귀신 같이 알아챕니다. 침대에 눕는 순간 낑낑하며 몸을 베베 꼬지요. 첫째 때는 이런 반응을 보이면 다시 안아주거나 토닥토닥 달래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잠들게 하려고 노력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이도 침대에 스스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믿고 기다립니다. 그저 곁에 앉아서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바라보며 잘 적응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죠.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는 믿음이 바탕이 된 기다림 덕분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어나 지금까지 부모, 친구, 애인, 동료, 상사, 후배 등 모든 인연의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기다림을 받아온 것이죠. 제가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을 포함한 많은 주변 분들의 믿음과 기다림이 덕분이죠. 지금은 당장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분명히 성장해서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될 때까지 묵묵히 버텨주는 기다림. 이런 믿음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참 감사하고 또 든든합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수많은 분들이 저를 믿어 주셨다는 생각에 감사하고 그 믿음만큼 성장해 낸 제 자신에게도 감사합니다.
첫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몰랐던 감사함입니다. 그 시절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항상 짜인 시간표와 할 일 목록을 지우는 일에 매달려있었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으며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한 생명을 키우는 경이로운 일도 할 일 목록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1번 먹이기 끝내고 2번 트림시키기 끝내고 3번 끝내고 4번'이라고 생각하며 목록을 지워나가기에 바빴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언제나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직장동료들과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동료들과 사담, 사적인 자리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시간에 일을 더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아니라 효율성 높은 기계가 되려고 참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계가 되다 보니 당연히 일을 잘하게 되었고 일 잘하는 기계에겐 보상도 따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계화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궅혔졌습니다.
그렇게 기계 같은 사람이 되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 일을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요?', '언제 쉬세요?', '일 중독이야', '저 사람은 곁을 안 줘' 이상하게도 제가 옳다고 생각한 기계처럼 일 잘하는 사람이 될수록 제 곁에 사람들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빨리 얻기 위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기계 같은 사람이 되었죠. 악순환이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은 가정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정에도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가정에서도 기계가 되려 한 것이죠. 그러다 보니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보다는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나?',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두는 것보다는 내가 빨리 알려주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와 같은 기계적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일 처럼 빨리 처리하려고 급급했던 것이죠. 그 결과 당연하게도 가족들과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빨리 처리하려는 저와 믿음과 기다림을 바라는 가족들 사이에 불화는 당연한 것이었죠.
그런 재촉하는 삶 때문일까요. 둘째가 유산되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죠. '아기 심장이 멈췄데, 어떡해' 먹고 있던 점심을 다 버리고 그 즉시 상사에게 갔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진료 보던 병원을 찾아가 다시 한번 정확히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둘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곁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밥을 해주고 집안일을 하고 안아주고 위로하는 일이죠. 아내가 잘 회복할 수 있도록 그저 곁에서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무력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미안했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게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뿐이라니요. 일은 그렇게 효율성을 따져가며 잘하면서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아내의 아픔과 슬픔은 처리하지도, 할 수도 없는 멍텅구리 기계였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아내의 몸도 마음도 추슬러졌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요. 곁이 필요 없는 기계가 아닌 곁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요. 기계라면 전기와 윤활유만 있어도 돌아갈 텐데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의 곁이 필요했습니다. 나를 믿고 기다려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의 곁 말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그것 말입니다. 이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의 곁을 느끼려면 빠름 보다는 느림을 효율성보다는 적합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도 저는 조급해하거나 효율성을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항상 불안한 마음이 따라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람의 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해낼 것이라 굳게 믿어주고 그것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의 곁에 무한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께 그런 곁을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굳게 믿고 묵묵히 기다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무언의 토닥임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혹시 조급하고 초초하신가요. 그럼 잠시 토닥여 드릴게요. 그렇게 묵묵히 곁에 있을게요. 몸이 아닌 마음의 곁을 드릴게요. 다시 일어서실 거라 굳게 믿어요. 오늘도 당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