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제가 시청한 편은 배우 진기주가 나오는 편이었습니다. 진기주 배우는 배우가 되기 전에 삼성에서 일을 했었고 다른 직장인들과 비슷하게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앞으로도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것이 두려워 용기를 내어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기자에 도전했으나 그 생활도 얼마 못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마음으로부터 하고 싶다는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는 길을 녹록지 않았고 수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마다 들었던 이야기가 '나이가 많다', '너무 늦었다' 등 비관적인 평가였습니다. 비관적인 평가에 진기주 배우는 '연기하는 건 나이와 관계없다'라는 소신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한 PD를 만나 첫 작품으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진기주 배우는 그 작품 오디션 현장에서 PD에게 들었던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재능이 있는데 왜 눈치를 봐"라는 한마디였죠. 수많은 오디션에서 탈락하며 자신감을 잃어 가던 진기주 배우에게 그 한마디는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감동적인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제게도 인생의 감동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평생의 기억입니다. 어린 시절 제 생일날 아침이었습니다. 잠에서 막 깨어나 거실로 나가려는데 어머니께서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말없이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사랑한다, 생일축하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이 기억이 떠오릅니다.
진기주 배우와 제 경험은 시간으로 따지면 약 3초 정도로 정말 짧은 순간입니다. 하지만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죠. 이처럼 시간과 기억은 비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길고 지루했던 수업시간보다는 10분 동안의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놀았던 기억이 더 많은 것처럼요.
저는 기억은 감정에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발생한 사건에 대해 나의 감정의 진폭이 얼마나 컸는가에 따라 그 기억이 얼마나 유지될지 결정되는 것이죠. 감정의 진폭이 큰 사건일수록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죠. 진기주 배우가 PD에게 들었던 한마디는 3초였으나 그 기억은 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고, 제 어머니의 따뜻했던 짧은 포옹은 벌써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것처럼요.
이런 감정적 진폭은 나쁜 감정에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즉, 나쁜 상황에 느껴지는 나쁜 감정도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면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장기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다는 것이죠.외상 후스트레스와 같이 위험한 상황에서 느낀 극심한 공포가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것처럼요. 나쁜 감정은 좋은 감정보다 더 오랜 시간 기억됩니다. 왜냐하면 보호본능 때문이지요. 좋은 기억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나쁜 감정은 위험한 상황에서 생깁니다.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면 본능적으로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긴장하며 몸에 힘이 들어가고 감정의 진폭도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의 기억이 오랜 시간 남는 것이죠.
나쁜 감정을 일으켜야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채찍질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조언이랍시고 "너 그러다가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뭐가 될래". "넌 안돼", "네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나니까 이렇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조언이 아니라 분명한 폭언입니다. 이런 조언을 가장한 폭언은 아주 질 나쁜 감정을 발생시킵니다.
바로 자괴감과 수치심입니다. 이런 조언을 가장한 폭언은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자괴감에서 출발해 심한 경우 자신이 못나서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는 수치심으로 발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쁜 상황이 발생하면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깊은 자괴감과 수치심에 빠지게 됩니다.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걸려드는 것이죠. 악순환의 고리에 걸려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쁜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들은 감정은 진폭을 점점 커지게 만들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됩니다. 그 결과 살아있는 것이 불행인 상태가 되는 것이죠. 찰나의 순간 내가 남긴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는 삶을 뒤흔드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출근길 버스,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 집에서 이야기 나누는 가족, 카페에서 데이트하는 연인,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 매일 같이 얼굴 보는 직장동료 등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부터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까지 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죠.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느끼고 있죠. 어떤 관계는 찰나의 관계이고 또 어떤 관계는 평생을 가는 관계 등 다양한 관계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관계에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감정의 진폭에 따라 찰나의 한마디가 80년이 될 수도 있는 것 처럼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에게 평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죠. 즉, 자신의 말 한마디의 무게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남긴 찰나의 순간이 다른 사람에겐 평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남기고 싶으신가요? 저는 따뜻한 감정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서로 위하고 돕는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이 곪아 썩지 않고 잘 아무를 수 있길 바랍니다. 전 믿습니다. 우리의 찰나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