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외로운 길, 누구도 그려주지 않은 지도

by 함트

2주간의 지옥 같던 기다림이 끝나고, ‘설암’이라는 두 글자가 내 삶에 낙인처럼 찍히던 날. 지난 15년간 매일 아침 길을 나섰던 익숙한 지도는 한순간에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되었다. 출근, 업무, 보고, 퇴근… 빼곡히 채워져 있던 내 인생의 경로들이 모두 지워지고, 눈앞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백지가 펼쳐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부터 그려 넣어야 할까. 그 막막함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내린 결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는 것’이었다.


15년간 내 청춘과 열정을 모두 바친 회사였다. 평사원으로 시작해, 코드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코드였던 시절을 지나, 하나의 개발실을 책임지는 실장이 되기까지. 그곳에는 내 땀과 노력뿐만 아니라,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들이 있었다. 나와 9개월 차이로 입사해 멘토 멘티로 만나 이제는 내가 짠 코드인지 그녀가 짠 코드인지 헷갈릴 경지에 오른 나의 멘티, 그리고 내 곁을 묵묵히 지켜온 원년 멤버들. 그들과 헤어지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들과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얼굴 보고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나의 퇴사 결정에, 회사는 마지막까지 따뜻한 배려를 보여주었다. 언제라도 다시 돌아오라며 등을 토닥여준 COO님과 총괄 대표님, 기술 수장들을 모아 송별회를 열어주신 CTO님, 그리고 20살 넘게 차이 나는 어린 동료들이 건넨 손 편지 속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고마운 인사들. 그 모든 온기를 박스 하나에 담아 내 자리의 짐을 챙겼다.


주차장까지 나를 배웅 나온 초창기 멤버들 앞에서,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무섭네, 후…”


그 한마디에, 동료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도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두 함께 눈물바다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서둘러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룸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15년의 시간을 향해 나지막이 작별을 고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나는 백지 위에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간을 되찾았다. 출퇴근에 쓰던 왕복 3시간은 아내와 함께 집 근처 동산을 산책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아 함께 장을 보고, 서툰 솜씨로 저녁을 차렸다. 두 번째로, 사랑을 다시 채웠다. 대학 시절부터 만나 19년의 세월 동안, 사느라 바빠 조금씩 말라가던 사랑의 우물에 다시 두레박을 던졌다. 아내가 좋아하는 서점에서 나는 IT 서적을, 아내는 소설책을 들고 함께 하루를 보냈고,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맛집 리스트를 함께 지워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를 준비했다. 밤이 되면 내 서재는 전투 지휘 본부로 변했다. 비싼 마이크를 사고, ‘mimic-recording-studio’ 오픈소스를 Docker로 띄워 내 목소리를 학습시킬 데이터셋을 만들었다. 수술로 잃게 될 내 목소리와 말투, 억양을 붙잡기 위해 밤새도록 문장을 읽고 녹음했다. 낮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고, 밤에는 다가올 미래에 맞서 싸울 무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정답도, 경로도 없는 길 위에서 2주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참으로 외로운 길이었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고,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이 지도의 목적지로 ‘완치’라는 결과는 너무 멀다.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과정 그 자체가 더 맞겠다.


나는 이 미지의 땅 위에, 내 손으로 직접 한 뼘 한 뼘 길을 내고 있었다.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인생의 지도를 내 의지로 그려나가는 첫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잠시, 목소리를 잃은 분들을 위한 안내서


수술 직후, 혀나 성대의 문제로 잠시 목소리를 잃었을 때 찾아오는 답답함과 상실감은 생각보다 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표현할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쉽게 우울해지거나 상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의 손가락과 스마트폰이 새로운 성대와 혀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 막막한 순간을 위해, 제가 직접 만들어 기부한 소통 도구 "말로 해" 서비스가 있습니다. 회원가입이나 로그인 없이, 누구나 즉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타이핑으로 소통하기: https://mal.roe.kr


이 사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장 카드’ 기능입니다. 미리 ‘여보 사랑해’, ‘자기야, 나 물 좀 줄래?’, ‘화장실 가고 싶어요’와 같이 자주 쓰는 문장을 카드로 저장해 두세요. 그리고 필요할 때, 그저 스마트폰 화면의 카드를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내 마음이, 내 필요가,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선명한 목소리로 전달됩니다.


답답함에 홀로 힘들어하기 전에, 이 도구가 여러분의 잃어버린 목소리가 되어줄 수 있음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P.S. 동료 개발자분들을 위한 기술 정보


혹시 저처럼 IT에 종사하는 개발자시라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자신의 목소리를 AI로 보존해 두는 방법을 시도해 보실 수 있습니다.

나만의 목소리 AI 만들기: https://sce-tts.github.io 프로젝트를 참고하여, 목소리 녹음 파일과 텍스트로 데이터셋을 구축해 직접 TTS(음성합성) 모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모델은 개인 웹사이트에 올려두고 필요할 때 언제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정보가 가장 절실한 분에게, 막막한 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