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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햄통 Oct 31. 2021

외교 통역과 비즈니스 통역

통역사에게 개입의 자유가 존재할까 

발화자가 확실한 메세지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같이 신이 나서 얘기하게 된다. 이 얘기를 더 정확하게, 맥락에 맞게, (비즈니스의 경우) 조금 다르게 말하더라도 찰떡같이 전달해주고 싶어진다. 난 그 사람의 인생을 살지도, 그 사람의 업무를 해온 것도 아니지만 잠시나마 그 사람으로 빙의(!)해서 말하게 된다. 


발화자의 메세지가 불분명하고 모호하면 나까지 민망해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본인도 확실치 않으니 통역도 같이 말려버리는 느낌이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그냥 들은대로 그대로 전달을 해줘야지 해도, 원문의 메세지가 이상하기 때문에 통역을 해도 이상하다. 


통역을 하다 보면 ‘끼어들어 본인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원칙적으로는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자기 얘기를 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통역사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본분으로서 되고 말고를 떠나서 통역사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런 마음이 들 수는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비교적 대화에 끼어들고픈 욕망이 적은 축이다. 흥미있는 주제가 나오거나 잘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자리면 가끔 그럴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주관이 강한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인지 통역할 때 발화자로서 대화에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아님 내용이 어려워서인가? 통역하기 급급해서인가?ㅋㅋ)


그렇게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하는 나도 비즈니스통역을 하면서 당장 끼어들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경우, 혹은 너무 우유부단해서 의사결정을 못하는 경우. 정말로 유통기한 지나서 무른 두부 같은 나임에도, 끼어서 결정해주거나 정리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결국 항상 마음 속에 샤우팅의 메이리만 남지만...


‘그러니까 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제발 예스 or 노 로 대답해주세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에여!!!!!’ 


외교통역에서는 절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비즈니스통역 시에는 어느 정도 티 안나게 개입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한국 분이 ‘A 사업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라고 말했다면, 그런데 여태까지 주구장창 얘기했고, (아니 누가 봐도) 상대가 A 사업에 관심을 보인 분위기라면, ‘A 사업에는 관심이 있으신 거죠?’라고 물어본다. 그래야 쓸데없는 두세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 


혹은 필요한 경우 단어를 추가, 변경, 삭제하거나, 풀어서 얘기할 수도 있다. 


때로는 직접 요청을 받기도 한다. “‘우선협상대상자’라는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데 중국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따가 통역사님이 풀어서 설명해주세요.” 


(외교 통역의 경우, 미묘한 어감마저 너무 중요하고, 어떤 단어/화법의 선택이라도 그 목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원문에 충실히’ 통역한다)


만약 인하우스 통역사이거나 내부자라면, 아니면 포지션이 엄격하게 통역사가 아니라 사업진행자이거나 커뮤니케이터, 모더레이터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더 자유롭게 개입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은 오히려 시간과 에너지를 단축시키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훨씬 효과적이다. 한편 똑똑하거나 사업을 잘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 만이 잘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종합


외교 통역은 정말 조심스러운 영역이라, 무조건 word by word. 자그마한 일탈도 꿈꾸지 않는다. 

통역과 번역 모두 각자 스타일이 있다. 여태까지는, 과유불급하느니 다소 보수적으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시작점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 시작점(보수에 치우침)을 기준으로, 비즈니스 통역은 어느 정도 유연성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단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러므로 통역 영역에 따라 통역사의 자유도와 창의성(?)의 발휘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포지션이나 상황에 따라 정도를 조절하는 게 관건인 듯 하다.

(항상 ‘적당히’가 어렵단 말이지)


사진은 푸단대학(复旦大学) 한중관계 강연 모습. 본문 모든 사진의 출처는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国际问题研究院)
 2018년 11월. 한중관계 및 한반도 정세를 주제로 한 노영민 전 주중대사님의 강연
강연통역 중 웬일인지 구석에서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는 햄통. 원장님이 재미난 얘기 하셨나 봄
중국 대학교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모두 진지하고 열정적인데, 그럼에도 각 학교마다 확연하게 혹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나 느낌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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