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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햄통 Sep 24. 2020

사실은 덕후가 되고 싶었나

못하는 것을 좀 낫게 만들 것인가 잘 하는 것을 더 잘할 것인가

유한한 시간을 분배할 때, 이미 잘하는 것이라면 투입 시간을 줄이고, 못하는 것이라면 시간을 더 투자하여 평균 정도는 올려놓자.


한국에서 받은 교육은 그랬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일단 교육 시스템 상 그랬다. 영어는 100점인데 수학이 50점이면 무슨 소용이냐. 등수가 떨어지고 등급이 떨어지고 좋은 대학 못 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사랑하는 애(영어)와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싫어하는 애(수학)와는 인상 팍 쓰며 붙어 있어야 했다. 설사 사랑하는 애의 점수가 떨어져도 싫어하는 애의 점수가 높아지면 평균이 높아지니까, 그것은 잘 하고도 잘 하는 일.


둘째, 덕후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 나조차 덕후는 일본 애니 좋아하는 사람이나 하는 것/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80년대 옛날 사람) 한 우물만 팠다가 그 자리가 수원이 없는 곳이면 어쩌지? 애초부터 방향이 틀린 것이면 어쩌지? 차라리 여기저기 우물을 파다 보면 어딘가 조금이라고 나오겠지, 그런 마음으로 뭐 하나를 열심히 좋아하는 것보다 여러가지를 그럭저럭 해내는 편이 낫다는 인식.


난 부모가 안 되어봐서 잘 모르지만, ‘우리 애 축구 잘 해’, ‘우리 애 춤 잘 춰’ ‘우리 애 그림 잘 그려’ 이런 말 열 마디 보다 ‘우리 애 공부 잘 해’ 이 한 마디가 가장 우월한 것 같았다. 사회에 나오면 회계를 잘 하는지, 음악을 잘 하는지, 글을 잘 쓰는지,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는지, 그런 것들이 중요한데, 지금 생각하면 그 정체성 참 모호한 ‘공부’라는 존재가 부모님 어깨의 계급 훈장 같은 존재였다.


셋째, 가정환경의 영향도 있었을 게다. 우리 엄마는 뭐 하나에 빠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타입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본인이 그런 스타일이니 자식들도 그렇게 키웠다. 영향을 받고 안 받고는 자식 나름이나, 나는 또 그 영향을 안 받지 않았다. 하나에 빠지는 것이 두렵고, 하나에만 시간을 쏟아붓는 것을 잘 못한다. 덕후력이 굉장히 떨어진다. 그래서 무슨 일을 진득히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라고 이 나이 되어서도 엄마 핑계를 대본다)


우리를 키운 부모님과 교육시스템은, 뭐 하나를 잘 해서 대단히 성공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 확률을 따진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시대적으로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받는 분위기도 사회적 구조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혀 다른 길로 가서 폭망하느니 중간 정도 해서 중간 정도 살면 된다, 거기서 더 발전하면 좋고. 뭐 그런.


게다가 나는 통번역을 공부하며 하나에 끝을 보는 것보다 여러가지를 두루두루 다양하게, 짧고 굵게보다 길고 얕게 아는 것이 더 유용하다 보니 그런 경향에 익숙해졌다. 깊게 파고드는 데 에너지 쓰는 법을 잘 모른다. 중국어 하나 만큼은 그렇게 한다고 쳐도, 요즘은 그거 하나로 족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통번역 공급이 늘어나면서 언어 자체로는 부족하고, 다른 전문성을 구비하도록 요구받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 나는 어떤 덕후가 되어야 할까?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즐겁고도 제대로인 덕후가 될 수 있을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뭐 그런 고민을 가끔 하는 요즘.


덕후도 덕후 나름이긴 하지만, 아무튼 요즘은 다양한 분야에서 점차 덕후가 빛을 보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난 덕후가 아니라 아쉽지만 이런 변화의 흐름이 너무 고무적이다. 덕후에 대한 동경은 있어 왔던 사람이기에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막연한 희망과 함께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눈치 보지 않고 덕후력을 키워가고 싶단 생각도 든다.


덕후력은 타고 나는 것일까(태생적-덕후가 될 사람은 어떻게든 된다) 키워진 것일까(사회적-피아노 연습이나 운동 같은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든 훈련되고 발달될 수 있는 것일까?(동기의 문제일까, 방법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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