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달린 걸까
연말이다. 누구나 한 해가 마무리되는 연말이 되면 최근 1년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보람차게 살았는지 생각하며 뿌듯함을 느끼고 싶었다. 특히나 29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부담감 때문인지 그 뿌듯함에 대한 욕망은 평소보다 거대했다. 이 갈증을 메꾸고 싶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자부심으로 나 자신을 열심히 포장하려 할 때이기도 했다.
평소 식단을 조이고 운동 강도를 높인 적이 있었다. 그 부작용으로 매달 일정하게 하던 생리가 멈추었다. 이전에도 심한 다이어트로 주기가 틀어진 적이 있었음에도, 그 일을 반복한 것이다. 주변에서 너무 말랐다고 말할 때도 나는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하며 근육도 키워나가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단지 내 목표치의 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SNS에 올리는 사진을 보며 주변에서 감탄하는 시선을 즐겼다. 결국, 주기를 맞추기 위해 간 병원에서 결국 의사 선생님의 타박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잘 먹고 잘 쉬는 거예요. 다른 처방은 없습니다. 1월까지 잘 쉬고 다시 오세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잠시 멍해졌다. 그럼 지금까지 난, 잘 못 먹고 잘 못 쉰 걸까? 정말 열심히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가 이룬 건 무엇이지?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더 높은 사회적 위치? 아니었다. 그럼 명예? 그것도 아니고, 건강은 더더욱 아닐 터이고.
그럼 난 무얼 위해 열심히 살려고 한 걸까?
문득, 울컥했다. 무엇을 위해 잠을 줄이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한 걸까. 목표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번 되짚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것저것 손을 벌리며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던 걸까. 그 최종 목표는 돈이었을까, 아니면 내 명예였을까. 아마 시작할 때는 그 두 가지 모두였던 것을 위했음을 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와 동시에 돈도 벌고 싶었다. 물론 글 쓰는 일이 내 자아실현과 관련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그 어떤 것보다 건강이 우선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을 안다.
20대의 끝자락, 누구의 말도 듣기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20대였다. 전 남자친구가 사회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줘도, 부모님이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무시하고 혼자만의 판단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이 나였다. 그런 내 삶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항상 강한 척했던 내가 여린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너는 잘하고 있다. 앞으로도 잘할 거다. 진심 어린 토닥거림이 필요했다. 아무리 혼자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그런 나약한 인간이 나였기에. 성숙해지고 싶었지만, 겉으로만 열심히 사는 척하는 아직은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전 남자친구에게는 가끔 이런 모습을 보였던 터라 한번 연락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접어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행동을 후회할 것이라는 이성이 멋대로 행하려는 마음의 발목을 붙잡았다. 몸에 밴 습관이 무섭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스장에서 러닝을 하며 '멜로가체질'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
"그냥 하던 대로 버티면 돼. 드라마든 연애든. 나 봐, 얼마나 잘 버텨?"
분명 지금까지의 내게는 별 의미 없는 말이었건만, 이제야 그 의미가 이해되었다. 나만 몰랐나 보다. 인생은 버티는 거였는데. 나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버티는 게 아니라 인생을 즐겨보려고 발버둥 쳤나 보다.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버티면서 사는 걸까. 모든 사람이 인생에 버킷리스트를 두고 그 버킷을 이뤄나가려고 노력할 텐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는 걸까. 나 또한 잘해오던 과정에 물음표가 생기니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삶의 목표. 이제껏 해본 적 없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이상스레 29살 연말에 고개를 든다. 2023년에는 어떤 버킷리스트를 세우기보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리고 목표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로 다짐했다.
사진 instagram @pillter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