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가이드라고 생각하자
반은 재미로 반은 진지하게 자식과 해외여행 가는 부모님의 십계명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부모님이 여행지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리한 것이다. 십계명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아직 멀었냐?’ 금지,
‘음식이 달다, 짜다’ 금지,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다’ 금지,
‘겨우 이거 보러 왔냐’ 금지,
‘돈 아깝다’ 금지,
‘이거 한국돈으로 얼마냐’ 금지 등.
결국은 여행에서 불평불만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십계명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면 코미디언 박미선 님이 유튜브에서 한 말처럼 불만이 나오실 것이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거네”
부모님과의 여행은 반드시 패키지로 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가뜩이나 해외여행을 가면 조금 헤매고 뚝딱거리는데, 온전히 나에게 의지하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자유여행은 고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여행으로 가서 고생하지 말고, 가이드가 알아서 해 주는 패키지로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패키지여행을 종종 해보셨기에 적응하는 게 더 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정답일 수도 있다. 패키지는 돌발상황이 거의 없다. 길을 잃을 일도 없고, 의사소통의 문제도 없다. 대중교통을 타는 불편함도 없으며, 식당에서 길게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현지 식당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고민할 필요도 없다. 가장 큰 장점은 여행지에서 꼭 해봐야 하는 모든 것들을 빠른 시간 내에 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패키지는 생각보다 힘들고 고되다. 어떻게 보면 버스로 필요한 관광지에 데려다 주니 편하게 보이지만, 패키지 대부분은 아침 일찍 조식부터 시작해서 저녁 먹고 휴식을 취할 때까지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쉬어갈 수 있는 일정들이 아니다. 부모님의 체력이 좋으시고 잘 걸어 다니시면 다행이지만, 만약 걷는 게 힘드시거나 체력이 약하신 다면 오히려 패키지가 더 힘드실 수 있다.
우리 가족들과 첫 해외여행은 베트남, 다낭이었다. 가족들끼리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이었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의 첫 해외여행이셨다. 부모님은 모든 여행 준비를 나에게 맡겼다.(동생은 ‘누나가 하라는 데로 할게’ 이러면서 빠져버렸다. 나쁜 새끼) 나도 처음에는 당연히 패키지로 알아봤다. 내가 부모님을 데리고 다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자유여행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우선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라고 불릴 만큼 한국인이 많이 가는 곳 이어서 정보도 많고 카톡으로 각종 예약이 가능했다. 또 패키지 후기들을 보면 일부러 쇼핑몰에 간다거나 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걱정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랑 가는 게 아니면 언제 부모님이 자유여행을 해보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패키지는 친구들끼리 혹은 부부동반으로도 가실 수 있지만, 어른들끼리 자유여행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젊은 시절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닌 경험이 없는 세대이다. 한 번쯤은 자유롭게 해외로 다녀 보시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자유여행으로 계획을 세웠다.
자유여행으로 방향을 잡고 나니 그때부터는 얼마나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느냐가 관건이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이라면 조금 계획을 느슨하게 잡아도, 여행지에서 정보를 찾고 실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부모님과의 여행은 모든 정보 조사와 결정이 나에게 맡겨진 만큼,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알아보고 계획했다. 현지 식당으로 가면 향신료 등이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어서, 최대한 한국인들이 많이 가면서 전반적으로 깔끔한 곳 위주로 맛집을 골라두었다. 일정 중 하루는 한국 식당에 들르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랩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어서 대부분 일정의 이동 수단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다낭에서 조금 멀지만 베트남의 옛 수도인 후에에 가는 원데이 투어도 예약했다. 최대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동선을 촘촘하게 짜고, 예약을 해 두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부모님께 몇 가지 사항을 단단히 고지했다. 위에처럼 십계명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주의를 드렸다.
‘식당을 몇 개 찾아놨지만, 한국인이 많이 가는 곳 위주로 했기에 웨이팅이 있을 수 있다.’
‘나도 처음 가는 곳이라 조금 헤맬 수 있다. 기다려 달라’
등등 부모님께 당부했다.
십계명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자식들의 마음은 나도 너무 이해가 간다.
이렇게 준비를 철저히 하고 부모님께 당부도 드렸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자유여행은 돌발상황이 많고 우당탕탕한 여행이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족 구성원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카드는 거의 안 쓰고 돈을 환전해서 갔는데 베트남 돈은 워낙 단위가 크고 디자인이 다 비슷해서 계산할 때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당시 유행했던 ‘동지갑’을 다른 한국인들이 가져온 것을 보고 아버지가 너는 왜 저런 거 안 해왔냐고 하는데, 솔직히 억울했다. 나도 알고는 있었는데, 가족들이 보기에 너무 유난이라고 할까 봐 안 했던 거였는데...
또 한 번은 택시를 불러서 관광지에 갔는데, 택시기사가 다음 일정을 묻더니 자신이 기다렸다가 거기에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케이 했는데 알고 보니 대기시간도 다 쳐서 돈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기사랑 실랑이하기도 어려워서 그냥 돈을 다 줘 버렸다. 이걸로 부모님이 핀잔을 주는데 좀 짜증도 났다.
나만 다 해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닌 부모님이 가면 좋은 곳 위주로 다녔다. 다른 건 다 양보 가능한데 카페도 잘 안 가시려고 해서 그건 좀 속상했다. 부모님 주장은 호텔에 있는 커피를 마셨는데 왜 카페에 가야 하냐는 것이었다. 돈이 아깝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왜 여기까지 와서 카페에 앉아 있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베트남에 갔으면 1일 1 카페는 기본 아닌가. 아마 친구들이랑 갔으면 하루에 두 번 이상 갔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 혼자 여행을 갔을 때와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 나의 여행 방식이 다른 것처럼, 부모님과 여행을 갔을 때는 나의 마음 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부모님께 여행 십계명을 알려드리는 것도 좋지만, 나이 든 부모님의 행동이 바뀌는 것보다 그냥 자식인 내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 속 편하게 여행하는 지름길이다.
부모님과의 스페인 자유여행기를 담은 곽민지 작가의 [걸어서 환장 속으로]에서는 부모님과의 해외 자유여행을 꿈꾸는 이 시대의 자식들이 알아야 할 체크 포인트가 있다.
그중 하나는 부모님들의 흔한 거짓말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엄마는 아무거나 괜찮다.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잘 먹는다..’
아니다, 부모님과의 여행은 아무거나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아무거나 먹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숙소에서 숙박을 할 수 있지만 부모님은 아니다. 한식이 있는 식당을 알아둬야 하고, 숙소 컨디션은 최소한 패키지에서 잡는 호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 가는 부분은 부모님과의 문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살아온 배경과 시대가 전혀 다르다. 이걸 알고 있으면 부모님과의 여행에서 마음 상할 일이 줄어들 것이다.
부모님에게 십계명을 읽히는 자녀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부모님이 십계명을 읽는 것처럼 자녀들도 자신 마음 가짐을 고쳐야 한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가이드이다.”
부모님과의 여행의 순간은 너무 힘들었지만, 다시 생각하니 또 즐거웠다. 이왕 효녀 노릇 하는 거 확실하게 해야지 나중에 후회가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