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들 Apr 15. 2016

JUST DO IT!

구부러진 등, 그 위의 낡은 'just do it'


오랜만에 컴퓨터로 브런치에  접속했는데, 1월29일에 쓰다만 글이 있노라며 팝업창이 떴다. '이어쓰기'를 눌렀더니, 'JUST DO IT!'이라는 제목만이 덩그러니 쓰여있다. 기억 난다.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아서, 언제나처럼 그렇게 접어두었던 어느 날의 일기였다.


'JUST DO IT!'이라는 문구는 스포츠 브랜드 NIKE의 것이다. 나도 이 브랜드의 백팩을 하나 가지고 있지만, 그 날처럼 저 한 문장에 오래도록 시선을 두었던 적은 없었다. 대전역 'KORAIL장터'인지가 열려, 기차를 타려는 사람, 기차에서 내린 사람저녁 반찬거리라도 사가려는 사람들까지 더해져 광장이 복작거렸다. 인파 속에서 무심하고 약간은 예민하게 걷던 나의 다리가 어떤 작은 사람의 뒷모습에 덜컥 멈춰섰다.


왜소한 체구, 구부러진 등허리를 가진 어느 동네에나 있는 '노인'이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그렇듯이 그녀의 걸음 역시 불편해보였다. 저얼뚝, 저얼뚝 했다. 70년 이상을 쉬지 않고 일한 관절들이 이제는 그만 모두 닳아버린 탓이겠지. 나는 사실 길에서 노인들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그들 뒤에서 걷기 시작해서 그들보다 앞질러 가는 나의 튼튼한 다리와 힘찬 걸음이 미안해서 그랬고, 그냥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그들의 얼굴에 주름이 지고 눈커풀이 내려앉고 눈동자가 뿌옇게 되어버린 것이 어쩐지 이상스럽고 슬퍼서 그랬다. 시금치를 파는 할머니들의 항상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눈은, 나로 하여금 그들이 마치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들에게 묻어있는 삶의 흔적들을 응시할 용기가 없어서 언젠가부터 나는, 시선이 나이 든 이들에게 너무 오래 머물러 있지 않도록 신경쓰며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그 날만큼은 어쩐지 그만 그녀의 뒷모습에 발길을 멈추고 만 것이다. 왜 노인들의 가방은 항상 미어터질 듯이 빵빵한 것일까. 왜 노인들은 양 쪽 끈의 길이를 맞출 줄도 모르고는 가방을 삐뚠 채로 매고 다니는 것일까. 왜 또 그것들은 노인을 더 노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

그녀의 굽은 등허리에 얹혀있는 가방은 유행이 한참 지난 NIKE 브랜드의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간 손자에게서 얻은 것일까. 옆집 노인의 손자가 중학교에 올라간 것인지도 모르고, 주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이 사거나 자식들에게 선물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낡은 가방의 정면에는 'JUST DO IT!'이라는 글자들이 부분부분 벗겨진 채로 새겨져있었다. '그냥 해버려!'라는 힘찬 외침이 그녀의 절뚝거리는 걸음에 맞춰 들썩다. 나는 그녀를 붙잡고 대체 왜 이런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이냐고, 거기에 쓰인 영어를 읽을 줄은 아느냐고, 화를 내고도 싶었다. 그녀는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냥 해'볼 수 있을까. 아니, 지난 생 동안에 몇 가지라도 '그냥 해'본 것이 있었을까.

나는 그 때, 속으로 이유도 없이 울었다.

 


나는 왜, 늙는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 하고, '늙은 존재'를 그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어떤 오래된 왜곡일 것이다. 그게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잘 모른 채로 외면해버리며 산다.

그러다가 이렇게 한번씩 마주하고나면, 쉬이 잊히지가 않는 것이다. 대전역 광장의 언저리를 부지런히, 그럼에도 한없이 느리게 걷던 작고 늙은 그녀의 뒷모습이 여적 이렇게.

작가의 이전글 걱정이 하나 생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