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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들 Oct 31. 2015

이사를 간다. 1.

지나간 것은 웬만하면 재미있다.

돌아오는 일요일은 이사를 가는 날이다. 스물한살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으니, 혼자 먹고 자며 하나의 공간을 꾸리고 산 시간도 정말 꽤 길었다. 갓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는 운이 좋아 기숙사에서 살았고, 그 이듬해부터는 기숙사 근처에도 못 가봤다. 학과에서 성적으로 상위 몇프로 안에 드는 학생들만이 기숙사에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가난했던 나는 공부까지 안 해서 더 가난하게 살았다. 1학년을 마치고 곧장 휴학을 해서 1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번 돈보다도 착취 당한 노동력이 더 많았던 것 같다.

6개월간은 두 탕을 뛰었다. 아침8시부터 오후3시까지 편의점에서 어서오세요 gs25입니다를 반복했다. 편의점 알바는 절대로 계산만 하지 않는다. 새로 들어온 물품 검수를 하고, 진열대와 냉장고를 채우고, 썩은내 나는 라면국물과 찌꺼기를 비운다. 그리고 동시에 계산을 한다. 틈만 나면 최선을 다해 졸아댔지만 피로는 전혀 풀리지 않았었다. 3시에 퇴근을 하고 집에 가면, 나를 안쓰럽게 여기던 엄마가 차려준 점심을 먹고 2시간 낮잠을 잤다.


편의점 일이 끝나면 뒷편 주차장에서 곧장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내 몸에서는 담배 냄새가 안 날수가 없었는데, 엄마는 내가 피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 가방을 빌렸다가 모르고 그 안에 담배곽을 넣어둔 채로 돌려드리는 바람에 결국 들켰었지만. 한편으로는 엄마는 알았을 것도 같다. 피곤에 쩔어서 터덜터덜 걸어들어오는 딸이 괜히 안 됐어서 냄새의 출처에 대해 반쯤은 짐작을 하면서도 추궁하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튼 엄마가 5시반에 나를 깨우면 두번째 알바를 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했었다.


오후6시부터 새벽까지 일하던 곳은 7080라이브카페였다. 테이블이 서른개 쯤은 됐었는데 알바생이라고는 나 혼자였고, 사장님은 가게에 자주 놀러오시던 가정 있는 보험사 아주머니랑 불륜을 저지르느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무실로 숨어들곤 했다. 그 동네의 라이브카페라는 곳은 낮에는 십대 애들이 체리에이드에 담배를 곁들여 시간을 죽이고, 해가 지면 바람직하지 않은 남녀관계의 중년들이 마티니 한 잔을 핑계로 들러 허튼 짓을 하는 공간이었다.


그것만 해도 꼴보기가 싫은데, 라이브밴드 공연이라도 있는 날이면 죽을 맛이었다. 테이블을 꽉 채운 손님들 중에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술을 퍼마신 아저씨들은 최악이었다. 주문벨에 허둥지둥 달려갔더니 하트를 날리지를 않나, 뒤에서 달려들어 끌어안지를 않나. 어느날엔가는 '씨발'이라고 소리내 말하고 말았던 것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씨발이었다.


두 알바 모두 시급은 3천원 초반대. 그렇게 일하고도 100만원 남짓을 벌었으니, 세상에나, 고약한 업주들이었고 순진한 알바생이었으니 잘 맞는 한 쌍이었다.


그냥 몇 자 적으려고 했는데 지난 스무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생각나는 것이 많고 그 생각들이 재밌어서 몇 편 이어쓰기로 결정했다(좀 전에). 지금은 다 못 쓴다. 새벽 4시30분이 넘은데다가 졸려서 머리가 아프고, 내일은 이 곳에서의 마지막 날인지라 할 일이 많다. 우선은 심플하게,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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