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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Jan 03. 2024

울고 들어온 너에게 - 김용택

오랫만에 김용택시인의 시집을 집어들었다.

전직 교사이셨던 분의 시집은 지양하는 편이다. 그들만의 보돌보돌하고 애정있고 살가운 문제가 가끔 부담스럽다. 

그런데 김용택님의 시는 조금 다르다. 담담하고 툭, 하고 끊기는 문장이 많아 마음에 든다. 

아이들과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마구마구 표현하지 않는점도 좋다. 물론 세상에는 인류애를 표현한 시도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끌리는 시는 아니다.


시 몇가지를 함께 나누고 싶다. 



# 어느날


나는

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날 나는 태어났고

어으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날의 일이고

어느날에 썼다.



# 베고니아


아파트 창틀을 넘어온 햇살이 좋았다.

햇살이 찾아오면 먼지들이 피어났다.

나없이도 지들끼리

잘 놀다 가는 작은 뒷방,

베고니아를 키웠다.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고, 쓴 시를 고쳐놓고 나갔다 와서

다시 고치고


베고니아, 아무도 못 본 

그 외로움에

나는 물을 주었다.



# 오래한 생각


어느날이었다. 

산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여기까지 왓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 서귀포


서귀포다.


생각 없는

바다는 등 뒤에 있고

나는 나무아래 앉아 있다.


바람이 목덜미를 지나간다.

새가 하늘을 날며 운다.

나뭇잎들이 핀다.


시간같은 것이 있을까.

그러면 돌담 너머로 네가 

웃고있을지 몰라


아주 쉽고

아주 쉽게 서서



# 한줄로 살아보라


한줄의 글을 쓰고 나면

나는 다른 땅을 밟고 있었다.

내가 낯설었다.

낯선 내 얼굴이

나는 좋았다.

그가 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살아보라.


# 울고들어온 너에게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보면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러면 나는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 가지 않은 봄


나는 두려웠다.

네 눈이, 사랑하게 될까봐

사랑하게 되어서

나는 두려웠다.

네눈이, 이별하게 될까봐

이별하게 되어서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눈.

나는 두려웠다.

내게 남기고 간 가장 슬픈 눈

나를 착아 헤매던

슬픈

그 눈


# 모독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돈이면 다냐고 묻지 않는다.

정말로 가난했던 사람은

절대로 가난을 자랑하지 못한다.

인간을 버린적이 있느냐?

진짜로 가난하면 돈이 다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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