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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Jan 20. 2024

백수린 - 눈부신 안부

책장을 마저 다 넘기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서도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책을 읽다 운적이 언제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작가의 따뜻한 온기가 내마음에 전해졌다. 사그라들기전에 글로 옮겨야 할것같아 급히 노트북을 열었다. 

이 책에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해야할지 모르겠다. 


혹여 이책에대해 결말이 포함될수 있으므로, 책을 읽으실 분들은 나의 글을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백수린 작가는 처음이다. 내가 수강하는 과목을 가르쳐주실 교수님이 되실 분이다. 그분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여 책 두세권을 주문했다. 그 첫번째 책이 눈부신 안부이다. 

먼저 이런 글을 써내려가신 분의 수업을 수강하게되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싶다. 

그리고 숱한 아름다운 문장과, 작가의 영혼을 갈아넣은 진심을 담은 문체를 만난것에 대해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제 좀 눈물이 멈추었다.


소설은 이런거구나, 막상 소설창작 수업을 들으려고 마음먹고 소설을 접하니, 마치 만리장성을 횡단하여 끄트머리를 찾는 느낌이다. 보석같은 문체와 정교하게 짜여진 스토리, 그 속에 녹아있는 역사,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서사. 무엇하나 빼놓을게 없는 소설이다. 


책을 읽으며 책 귀퉁이를 접는 습관이있다. 꼭 필사하고싶은 글귀가 등장할때 나오는 손버릇이다. 책이 접히는것도 아까워 최근에는 포스트잍을 붙이려고 노력해보았는데 허사였다. 당장 이 글귀가 너무 아름다운데 포스트잍을 찾으러 엉덩이를 떼는 것은 시간낭비다. 접고 접고 또 접었다. 도톰한 책귀퉁이를 어디서부터 옮겨야 될지 모르겠다.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요약이나 소개는 생략하려고 한다. 이미 많은 분들이 서평을 남기셨다. 또한 이책을 읽어야할 그대들을 김 새게 하고싶지는 않다. 오롯히 내 감정만을 터뜨린 글귀를 필사 하고자 한다. 온라인세상의 일부 텍스트와 바이트를 개인적으로 사용함에 용서를 구하며.



# 네 입을 통해 들어 본 적 없는 사랑의 말이 가득한 편지였어. 너의 말로, 보다 분명하고 선언적인 말로 듣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열렬한 고백들이 거기 적혀있었지. 우리는 단 한번도 세상의 많은 이들처럼 뜨거운 고백을 주고받지 못했잖아. 네가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다른말로 대신해야 했어. 널 향해 꺼지지 않는 숯처럼 타오르는 마음이 너를 상하게 할까봐, 너를 세계에서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들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까봐. 너의 손에 깍지를 낀 채 걷고, 너의 긴 속눈 썹에 입술을 갖다대보고, 네 향긋한 품에 내 얼굴을 묻고 잠드는 상상을 수도없이 했으면서도,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p229


#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있으니까 -p304


# 비행기가 기울고,  타원형의 창 너머로 푸른 바다와 은빛 모래밭이 서서히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독일 땅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를 상상한다. 이모들을 태웠고, 나와 엄마, 아빠, 해나를 태웠으며, 머지 않은 미래에 레나와 한수, 수많은 그리운 이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나를 태울 그 비행기를. 

중략 -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 등을 바로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비행기가 곧 지면에 닿기를 기다리면서, 그러고나면 우제에게 전화를 걸고 이렇게 말해야지. 안녕, 그동안 잘 지냈지? 나는 지금 막 도착했어. -p309


# 선자이모가 이 모든 진실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둠 속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되었다.


# 이모가 손을 뻗어 내가 아이였을 떄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음었다. 이모의 손길이 닿자, 나는 오래전 이모의 집 거실에서 있던 어린아이가 되어 이십년이 훨씬넘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전히 언니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 때가 있다고. 상실 이후 시간이 때때로 선처럼 흐르는것이 아니라, 쳇바퀴를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번 뿐이고 아까운거니까." -p227


# 우재가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평소보다 느린 어투로. 우재의 말을 듣는 동안 너무도 친숙한 슬픔이 가슴에 번져갔다. 


#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우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보폭으로 내 삶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둡게 했다. -p166


# 그게 그렇게 좋고. 우재의 말이 잎을 모두 잃은 겨울나무 같은 내 마음을 미풍처럼 흔들고 지나갔다. -p147


# 우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지만 나는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p142


# 우리에게 필요한건 각자의 불안을 견디는 일이었다. 우리를 조급하게 어른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결핍을 견디는. -p120


#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 레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침햇살 아래 부드럽게 몸을 드러내는 연둣빛 들판처럼 완만한 것이었다면, 한수를 좋아하는 건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과 벅차도록 밀려오는 기쁨의 계곡 사이를 곡예하듯 걷는 현기증 나는 일이었다.  내가 한수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한것은 우리가 슬픔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면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쨰 떨게하는 것이 사랑일테니까 -p100


# 하지만 해질녘 도서관 밖으로 나와서 버스를 타기 위해 푸른빛과 흰빛으로 일렁이는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어김없이 그 단어들에서 어떤 결여가 느껴지곤 했다. 예년보다 이르게 핀 벚꽃 아래를 걷는 사람들을 목격한 오후 같은 떄에는 더더욱. -중략 - 어디론가 멀어지는 벚꽃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완전히 잊어 버린줄 알았던 기억들이 봄밤의 꽃향기처럼 밀려왔다 -p73


# 마치 내가 알고있는 사람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희미해지는 걸 볼 때 처럼, 겨울 강아래 얼어붙어 있는 파문을 볼 때처럼 아득해지는 그 감정을 이름을 나는 여전히 모른다.-p44


#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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