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Feb 15. 2024

MILK, BLOOD, HEAT.

단시엘 모니스 소설집



인종을 언급하는 것은 좋은일이 아닐수 있으나, 처음으로 흑인여성작가의 책을 읽었기에 한번쯤 언질하고 싶다. 흑인 여성 작가를 타겟으로 검색하여 구입한 책은 아니다. 읽어 내려 가다보니, '그럴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어 검색해 보았다. 

'그럴것 같다'라는 느낌은 아마 이책을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모두 느끼지 않으셨을까 싶다. 단편소설 전체 맥락에 흐르는 기괴한 혹은 섬짓하지만 아름다운 반전, 그리고 대담한 문체와 소재, 마치 정호승님의 시를 소설로 마주하는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페미니즘 또한 적절히 녹아 들어있다. 

중간중간 마주하는 파격적인 소재가 아니라면 딸에게도 권유해주고 싶은 책이다. 

비유법과 메타포 또한 남다르다. 

매운맛 소설. 맘에든다.


모든 단편소설 흐름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으며, 솔직하고 어딘가 모르게 단단한 언어로 차분히 소설의 흐름이 진행된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 더불어 작가는 타인이자 우리 자신이기도 한 소녀, 엄마, 딸, 친구, 자매, 등 사랑스러우면서 가슴아픈 여성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초라함과 아름다움을 대담하게 직시한다."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초라함, 아름다움. 

이걸 적시한 옮긴이 또한 존경스럽다. 

나를 포함한 당신들 모두 초라함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미치도록 아름다우니까.


# 체육시간에 키라가 에바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기분이야. 눈에 보이는 물 따위 없어도 에바는 그게 무슨말인지 알았다. 그 묵직함, 숨 막힘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 기분에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은 마치 단어들을 배 속에서 부터 길어올리는 것과 같은데, 양동이로 아무리 퍼올리고 또 퍼올려본다 한들 하려던 말이 전혀 아니었다.


# 이 몸을 입고 있으면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낯설다. 열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공허가 짊어질 만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공허는 대체 누가 거기에 넣은 것일까? 때로는 공허로부터 기어이, 언젠가는 벗어날수 있을지 궁금해 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을 절대 반납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공허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니까.


# 에바는 엄마의 거대한 존재감에 둘러싸여 협박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더 우쭐해졌다. 엄마의 따스한 갈색 얼굴에 입 맞추고 싶었다.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후려치고 싶었다.


# 키라의 엄마가 뜰 구석 간이의자에 고꾸라진채 얼굴을 양손에 묻고 있었고 휘감아 걸친 목욕가운 사이로는 푸른 정맥이 비치는 우윳빛 허벅지 한쪽이 드러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결혼식 날 밤과 수많은 다른밤이면 에바의 기억이 되돌아가 닿는 장면이다. 그 앞에 다다가 서서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던 순간, 키라 엄마의 몸 전체는 마치 스스로를 들이마셔버리는 것처럼 움푹해 보였다. 에바가 그의 가운을 열고 그의 몸을 자기 몸에 끌어다 대어 살갗이 서소를 빨아들이며 봉인되던 그때를 떠올릴것이다. 사방으로 시간이 무너져 내리는 동안 그곳에 말없이 머물렀던 그때를, 에바의 정맥속에서 거세게 솟구치는 자기 딸의 피를, 열기를 내뿜는 울부짖음을 키라의 엄마는 느낄수 있는지 궁금해 하던 그 순간을.


# 갈라진 땅과 거대한 사와로 선인장과 내가 달려가는 저 서쪾을 바싹 말려버리는 뜨거운 공기와 붉게 이글대며 가라앉는 태양을 상상해본다. 그곳에서 표백된 듯 흰 모래를 헤치고 독사의 뒤를 쫒다 서늘한 달의 시선을 받으며 누우면, 살집으로 꽉 찬 배가 흔들 흔들 할것이다. 코요테들이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줄테지.


# 내 비아냥에 히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질질 끌고가던 그 가느다란 선을 내 스스로가 이제 막 넘으려 한다는 걸 느꼈지만 최후의 만처너럼 흡족한 이 분노가 꽤나 달콤했기에 스스로 갉아먹기를 멈출수가 없다.


# 혐오는 대부분 자신이 심리적으로 인지한 위험, 그러니까 우리의 죄책감이 나 고통을 은폐하는 거에요. 두려움인거죠. 우리는 두려운 대상을 어떤식으로 다루나요?


#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속에서 마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은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것과 같다고 프랭키는 생각했다. 마고를 바라볼 때마다 약간의 광황처럼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경이로움 이었다. 그 모든 중요한 문제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데 몸은 어찌 저리 가벼울 수 있는 걸까. 발바닥부터 코안쪽의 점막까지 모든 곳을 동시에 건드리는 그 느낌, 깊은 곳을 떠돌면서도 나는 정말로 심장의 박동을 느낄수 가 있는걸까. 


# 단지 엄마가 아니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두려움 가득한 별개의 존재, 나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이순간은 엄마에게도 지구상에서 처음 보내는 시간이라는 걸 마고는 문득 깨닫는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고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 "글쎄, 난 어둠이라면 샤일라에게도 있는거 같은데'

쇼니가 말했다. 

내이름을 듣는 순간 어떤 깊숙한 고통이 불현듯 내 배속을 훑고 지나갔다. 인정받았다는 느낌같기도 하고 수치심 같기도 한 어떤 것이었다. 열감이 얼굴 전체에 번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나 자신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어른들은 이 어둠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 도와달라고 소리쳤지만 갈매기들만이 그 소리를 들었다. 튜브 보트는 흔들흔들 부드럽게 멀어졌다. 우리가 내지르는 비명과 입속으로 밀려드는 짠물과 발가락 끝을 다급히 잡아 당기는 물결 따위에는 무심하게 저 멀리 환하게 빛나는 기슭은 간질이며 애태우는 리본같았다.

아무도 우리에게 와주지 않았다.

파도가 내 위로 너울거렸고, 나는 그아래로 무너져 내리며 벌어진 입으로 바닷물을 삼켰다. 내 두 눈꺼풀 아래로 빛의 반점들이 보랏빛으로 푸른빛으로 터져나왔다. 나는 이 너른 물과 함 몸이었고 너른 물은 내 안으로 파고 들어 내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선집,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