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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pr 20. 2024

박노해 - 너의 하늘을 보아

두번째 옮겨쓰기

시덥잖은 시를 끄적이는 중이다. 알면 알수록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배우기 위해 읽고, 배우기 위해 쓴다. 그러다가 여느 시인의 시를 읽으면 한없이 겸손해진다. 그런 많은 시인중 한분이 박노해 시인이다. 박노해 시인의 시는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고향, 추억, 아버지, 정치, 혁명, 젊음, 사랑, 아마 주된 꼭지를 꼽으라고 하면 열손가락이 넘어가지 않을까 한다. 읽는내내 다채로운 형식을 배워갈 수 있다. 깊은 울림과 쨍한 코끝은 덤으로 얻을수 있다. 모두 내 문장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부단히 노력하고 또 정진해야 할 남은 나의 숙제이기도 하다.


# 이유 따윈

나한테 왜이러는데

도대체 이유가 뭔데


이 세상엔 

이유따윈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저 감내하고 감당해야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이세상엔

이유없는 고통이 아주 많다


인생은 연습도 없이 던져졌고

불운은 예고도 없이 기습한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일종의 사고였다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 된 건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의미를 찾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러니 이유따윈 그만 묻고 

이렇게 라도 하자고 했다


어찌할수 없음에 순명할 것

어찌해야만함에 분투할것


난 이유따윈 몰라도 사랑하고 상처받고

다시 죽도록 사랑할 테니


# 사생관

사랑의 진정성은 이하나로 판정된다

네 목숨을 바칠수 있는가


누구도 너의 최후를 전해줄 수 없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그사랑 하나 살려내고 지켜내기 위해

눈물어린 네 모든걸 등 뒤에 두고 

기꺼이 네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


고맙다

이 낯선 지구에서의 힘겨운 한 생에

내 목숨을 바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적이 있고

내목숨을 다해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면 되었다


내 등뒤에  그대가 있어 나는 웃으며 간다

짧아도 길어도 그것으로 좋았다 난



# 정직한 詩

시가 되지 않는 건 

정직한 것이다


시가 되지 않는 건 

배가 고프지 않아서이고

고독하지 않아서이고

여린 나무 같은 시의 지팡이말고

붙들고 의지할 데가 많아서이다


시가 되지 않는 건 고마운 일이다


시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대지에 떨어진 씨앗처럼

나직이 붇혀서 잉태의 침묵을 살아라


그러면 시적인 삶이

시를 낳아주리라


폭풍과 눈보라 길을 걸어온

뼈저린 진실의 말을,

나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단하나의 말을, 

정직한 시를


# 상처를 남겨두라

거울앞에 서면 먼저 상처가 눈에 띈다

고문으로 상한 콧등과 급히 꿰맨 오른손

여기저기 독재 시대가 몸에 남긴 상처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중략-


그러니 제발 상처를 남겨두라

모든 인간을 환자로 만드는 섣부른 짓을 그만두라

그 사건과 경험의 가억자로, 각자 감당할 몫으로, 

자기만의 상처를 제발 남겨두라


상처를 눈감지도 말고 감추지도 말고

상처로 겁줘가며 애써 후벼 파지도 말고

세월과 성숙속에 좀 내비 두라


사람에겐 견디는 힘과 승화의 힘이 

자연히 자신안에 내재되어 있으니

스스로 치유할 여지를 남겨두라

인간의 신비를 신비로 남겨두라

하늘이 낸 목숨 하늘이 보살피게 

하늘의 몫을 좀 남겨두라


상처받는 순간이야말로

마음이 열려있는 순간이지 않은가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가슴아프지도 않다

사랑은 기꺼이 상처를 입는 것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처받지도 않는다

상처하나 없는 그는 타인들을 상처 낼 뿐

내가 상처받은 지점이야말로

위대한 힘이 깃든 빛의 장소일 수 있으니


상처위에 사로운 상처가 와도

상처받으면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말기를

상처속에서도 선한 걸음을 멈추지 말기를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기를


#아픈 심장을 위하여

다른 곳은 상하면 안 되지만

우리, 심장은 다쳐도 좋다


난 심장이 아프지 않은 자와는 친구도 하지 않았고

심장이 아프지 않은 여자와는

사랑도 하지 않았다


시를 모르고, 혁명을 모르고

꽃을 모르고, 신비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는 자의 심장은 

이미 시들어버린 심장이니


이 광막한 우주를 달리는

여기 고독한 지구 위에서

오늘같이 좋은 밤

좋은 사람들과 함꼐

우리 심장을 다쳐보자


자, 붉은 잔을 부딪치자

아픈 심장을 위하여!


# 이런날, 할머니 말씀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있어도 별일 아닌 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사태인 양

호들갑을 떨고 악소문을 퍼뜨리고

불안과 불신과 공포의 공기를 전하며

동네와 장터를 흉흉하게 만드는 

근본없는 자들을 향해서 할머니가 하는말


염병하네, 엠병하네, 엠병하네


저이가 염병을 퍼뜨리고 있다는

저이가 전염병과 다름없다는

할머니의 단호한 일갈.


엠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그런날이면

할머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강가에서 귀를 씻기고 눈을 씼기고

마당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놓고


천지 신명께 기도를 드린 후

호미를 들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마음밭에 쳐 들어오는

염병할 잡초 뿌리를 캐며


# 너의 어휘가 너를 말한다

말은 쉽게 통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가

어떤 어휘가 통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귀고 일하는가


나의 단어가 나를 말해준다

나의 어휘가 나의 정체성이다

나의 말씨가 세상 한가운데

나를 씨 뿌리는 파종이다


저속하고 교만한 어휘는

나를 추락시키는 검은 그림자

-중략-

나의 말씨가 나의 기도이다

나의 글월이 나의 수호자다

나의 문맥이 나의 길이 된다

나의 어휘가 바로 나 자신이다.


# 눈물대신 노래를

오늘 아침

땅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니

문득 알 것만 같구나

오늘이 이 지상에서

고단한 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나는 살아서는 눈물이었다

너무오래 울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살아서는 비명이었다

너무 오래 울부짖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나 죽을때는

눈물대신 노래를 불러다오


수많은 발길 아래 젖은 풀꽃이

최후의 순간에 흰 꽃씨로 하늘을 날 듯

모두들 나와 같이 미소를 짓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서로를 포옹해다오

살아서 눈물이고 비명인 내 사람들과


#그래로 두라

일상은 일상으로 두라

일상을 이벤트로 만들지 마라

일상이 일상으로 흘러갈 때 

여정의 놀라움이 찾아오리니


결여는 결여대로 두라

결여를 억지로 채우지 마라

결여는 결여된 채 품어갈 때

사무치는 그 마음에 꽃이 피리니


상처는 상처대로 두라

상처를 감추지도 내세우지도 마라

상처가 상처대로 아파올 때

상처속의 숨은 빛이 길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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