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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pr 28. 2024

아침은 생각한다 - 문태준

가재미로 무척 유명하신 시인이시다.

서정시에 취약하여 마음먹고 구매하였다. 일부러 서정시집을 선택하였는데

한편한편 꼭꼭씹어가며 읽느라 애를 먹었다. 

서정시는 어렵다. 읽는것도 어렵지만, 쓰는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아래 잠겨있고

내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앉은 이 긴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 초저녁별 나오시니

오늘은 세상이 날콩처럼 비려서

세상에 나가 말을 다 잃어버려서


돌아와 웅크려 누운 사내는

사다리처럼 홀쭉하게 야윈 사내는


빛을 얇게 덮고 일찍 잠들었네


초저녁별 나오시니

높고 맑은 다락집에서 기침하며 나오시니


물그릇 같은 밤과

절거덩절거덩하는 원광


# 제비1

제비를 뒤쫓아 날아가리 광평빌라 제일 아래층 모서리에 지은 제비집으로 날아가리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지은 당신의 집으로 날아가리 당신의 진흙집으로 날아가리 달무리 같은 집으로 날아가리 날아가 엄마, 하고 불러보리 둥지에서 부리를 족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기른 내 엄마


# 지금은 어떤 음악속에

오늘은 밝고 고요한 힌 빛이 내리시니

화분에 물을 부어주고

멀리 가 있는 딸의 빈방을 들여다본다

일곱살 딸이 작은 방에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다

그래, 지금은 어떤 음속에 있다

뒷숲에는 잎들이 지고

거실에는 어제의 식구들이 수런거리고

탁자위 돌, 조개껍질, 인형은 눈을 감고

나는 씌어지지않은 백지를,

백지의 빛읠 책상위에 가만히 펼친다

문장이 백지위에 어리고 움직인다

희미하고 물렁물렁한 감정을 갖고서

내 옆에는 한첩의 투명한 물이 있고

그옆에는 허물어진 그림자가 있고

노랗게 익은 모과는 향기를 풀어내고

때때로 떨어진 잎들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누군가 문밖에서 나를 불러

흰 빛속에 잠시 나를 들어올린다


# 첫눈

오늘 밤에

정말이지, 앞이 캄캄한 밤에

첫눈이 찾아왔지

하늘에 모공이 있나 싶었지

실처럼

가느다란 빛처럼

흰 목소리

땅속에 파뿌리 내려가듯

내려오는 거였어

예전에 온 듯도 한데

누구이실까

손바닥에 

손바닥에 가만히 앉히니

내 피에

뜨거운 내피에 녹아

녹아서 사라진

얼굴


# 요람

어미 토끼가 금방이라도 새끼를 낳으려던 참이었다

몸에 난 고운 털을 소복이 뽑아 새끼 낳을자리를 둥우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다

들과 뒷산에 가 토끼에게 먹일 씀바귀 칡잎을 해 오던 내 열살의 무렵의 일이었다

놀란 눈으로 본 가장 아름다운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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