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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y 01. 2024

물 위에 씌여진 - 최승자 시집

나는 오늘 냉소와 염세주의의 끝판왕 시인을 만났다.

그동안 나의 다소(다소???) 그늘진 글들은 그녀앞에서 작은 주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는 번데기 임을 인정하였다. 그녀의 시집을 읽으며 여러생각이들었다.

1. 읽을 수록 슬퍼진다. 나의 글도 이러할까?

2. 읽을 수록 슬퍼지는 글들은 과연 상업적 가치가 있을까? 순수문학을 좋아하는 나같은 인간을 제외하고 말이다.

3. 읽을수록 슬퍼지는 글들은 과역 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수 있을까? 그들의 멱살을 붙잡아 그늘로 끌고오는 것이 아닌가?

4. 그리하여 나의 글은 좋은 글인가? 나의 글은 편향적인가?


최승자 시인님 죄송합니다. 시인님의 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놀랐을 뿐.


각설하고.

이 시집은 정신병동에서 씌여진 시라고 이미 프롤로그에서 명시하고 있으며, 아주 개인적으로. 나는 이시집이 마음에 들었고. 그러나 두번 읽었다가는 나의 남색만 짙어질 것같아 고민스럽다.

고민을 많이 안겨주는 시집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학교 교수님께서 대표로 계시는곳의 출판사였고.


최승자 시인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아주고싶다.

아마도 나의 어깨처럼 얇은 뼈가 만져지지 않을까. 살도 없는 오돌톨한 어깨뼈.

그녀에게도 잔인한 4월이 있다면 어서 흘러보내고. 남은 노년은 조금 더 새로운 세상을 사시길. 왜냐하면 세상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고, 우린 그 스펙트럼을 선택적으로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맘에 와닿았던 시들의 전문이다.


아참. 최승자 시인의 시에는 아주작은 부분도 한자로 기표될때가 있다.

한자를 모르는 나는 읽는 시간이 두배로 걸렸다 혹시 읽으실 독자님을 위해 참고로 남긴다.


# 망량

한 형체가 절벅절벅 걸어가는데

그 그림자와 망량이 서로 싸운다

의식은 확실하게 걸어가는데

무의속 속의 무의식이 무의식에게

자꾸 싸움을 걸어온다


망량아 망량아

이 세상의 붉은 홍등가가 

그렇게도 서러웠었니?

한 점 흰 하늘이 없어서 

그렇게도 서러웠었니?

 

(이 세계사와 저 세계사 사이를 찔뚝 팔뚝 걸어갑니다)


# 신은 오후에 하늘은 밤에

시는 가장 여리고

시는 가장 맹독성이다

언제나 시인은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순간처럼 노래하고

오늘의 어느 詩 영화관에서는

죽음이냐 영원이냐

주검이나 연기냐 등을 상연하고 있다


(神은 오후에 더욱 명료해지고 하늘은 밤에 더욱 파래진다)


# 20세기의 무덤앞에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을 말한다

뒤에서 우리의 존재를 든든히 받쳐주는 그림자인 것마냥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환각제인 것마냥


20세기의 무덤앞에

아직도 양귀비 꽃 붉게 타오른다

잊어라 잊어라

잊지 않으면 되살아나리니

잊어라 잊어라 붉은 양귀비 꽃

더욱더 요염하게 피어나기 전에


잊어라 잊어라 

죽음의 문명을


어느 날 구름 한 점씩

새로이 피어나는 날들을 위하여


# 저기 갑 을 병 정이

저기 갑 을 병 정이 걸어간다

하나 둘 셋 넷 구령 붙여 지나간다

저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간다

잎피우다 꽃 피우다

저기 저기 모든 것들이 지나간다

모든 슬픔 모든 기쁨을 등딱지에 얹고서


오늘 나는 無心히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有心이 나를 건네다 보고 있었다

그 유심은 말하자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존재의 허를 찔려 주춤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유심의 이름은 무심이었다


(오늘 죽음의 영수증을 받으러 갔다. 당신의 죽음을 정히 영수합니다)


# 말馬들이 불쌍하다

나를 버리고 외출할 길은 없을까

남몰래 나를 벗어올릴 곳은 없을까


거리는 햇빛만 쨍쩅하다

가던 개 한마리 뒤돌아본다

세 여자아이가 고무줄 놀이를 하고있다


누군가 커튼을 드리운 창문 뒤에서

전쟁에 관한 長時를 쓰고 있다

그는 50여개국을 여행한 사나이라고 한다


햇빛은 더욱 쩅쩅해진다

가던 개 한마리 또 뒤돌아 본다

고무줄놀이 하던 세 아이 사라지고 없다


( 문명이 문득 울음조차 그친다)

( 말들이 불쌍하다 말들의  튼튼한 엉덩이와 긴다리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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