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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y 03. 2024

황정은, 백百의 그림자

나의 무지함에 놀란다. 부끄럽지만 황정은님의 책을 처음 읽어보았다고 감히 고백한다. 

단지 제목이 서늘하여 고른 책이었다. 그렇게 작가님을 향한 나의 디깅은 시작된다.

올해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추천하고싶은 소설이다. 


1. 작가의 호흡이 느껴진다. 짧은 호흡.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듯한.

2. 느린 서사와 아름다운 묘사. 

3. 서정시 같지만 해방시 같은 이중적인 구조

4. 그림자라는 메타포가 주는 상징적 이미지

5. 중간중간의 눈물, 그리고 위트.


180쪽분량의 장편소설이다. 책의 사이즈도 작고, 줄넘김이 많아 가볍게 읽을 소설이 필요해서 선택했건만.

가슴이 울려 몇번을 코가 찡했고. 한편 오무사 노인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배꼽을 잡았다. 

그리고 나의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나의 그림자는 안녕한지. 움푹 하고 입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볼록하고 발목부분이 솟아나와있어 내가 걸려 넘어질 일은 없는지. 혹시 나를 끌고다닐 준비운동을 하고있지는 않은지.

아주 오랫만에, 책을 읽는게 아까워 자꾸만 남은 페이지를 확인했다.

소장해야겠다. 빌려보는 것으로는 모자르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것이다. 작문은 이렇게 하는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질감이 들었다. 천재성은 노력으로 되는것이 아니구나.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구나. 그래도 괜찮아. 천재는 타고나도 괜찮다. 나에게 수많은 문장을 들려주었으므로.


나에게,

그런 책.



# 무재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것 같으니까요.

무재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 라고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중략-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말아요.

네.

그러면 계속걷죠,라면서 앞서 걷는 무재씨를 따라서 걸었다. 눈물이 솟았다. 무재씨 처럼 매정한 사람은 먼저 가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나대로 움직이고 싶었지만 이 숲에서, 그림자마저 일어난 처지에 그럴수도 없어서 눈을 닦으며 걸었다.

울어요?

울지 않는데요.


# 나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고 숲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알아보고 싶은데요.

좋아하면 되지요.

누구를요.

나를요.

글쎄요.

나는 좋아합니다.

누구를요.

은교씨를요.

농담하지말아요.


# 내가 참 속이 상해서 성질이 나는데 티낼 수는 없어서 팥죽만 꾸역꾸역 먹으면서 그래 그 얘끼 하려고 왔나, 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쓲 비비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라면서 요즘 그림자가 일어서, 라는 거였어. 밤에 자려고 불을 끄고 나면 창문으로 그림자가 올라간다나, 사는 집이 십상층인데 자구 올라가,라나 뭐라나,


# 서랍의 상태와 수리실 전반의 상태가 별로 다를 것이 없어서, 수리실은 금속으로 된 고래 배 속처럼 어두웠고 물질적으로 무한했다. 다른 차원으로 이어진 어느 바닥이 문득 뚫어지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이 단숨에 쾅, 하고 쏟아진 듯한 모습이었다. 


#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발목이 저려서 잡아보니 살갗이 싸늘했다. 요즘엔 계속 발목이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금슬은 잘 모르겠지만 무재씨,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배도 따뜻하고 좋네요.

네.

그냥 좋네요.

하며 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 먼데서 찌이, 하고 한꺼번에 매미들이 울자 계단 쪽에서 끄......하고 따라 울었다.


# 손님이 찾아와서 어떤 종류의 전구를 달라고 말하면 대답도 없이 서서히 걸상을 밀며 일어났다. 서두르는 법 없이 그렇다고 망설이는 법도 없이 선반의 한 지점으로 부들거리며 다가가서, 어느것 하나 새것이 아닌 골판지나 마분지 상자들 틈에서 벽돌을 뽑아내듯 천천히 상자 하나를 뽑아 내고 그것을 책상으로 가져와서 일단 내려둔 뒤엔 너덜너덜한 뚜껑을 젖혀두고, 이번엔 다른 선반으로 걸어가서 손바닥만한 비닐봉투 한장을 가지고 책상으로 온 뒤, 시간을 들여 정성껏 봉추를 벌려서 입구를 동그랗게 만든 다음에, 오른손을 상자에 넣어서 손톱만한 전구를 한움큼 쥐고 나서, 왼손에 들린채로 대기하고 있는 봉투속으로 한번에 한개씩, 언젠가 내가 다른 손님들 틈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재미있게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과자 주듯 떨어뜨렸다.


# 드는 자리는 몰라도 나는 자리는 이렇게 표가 나는 법이라고, 도느게 아쉽다고, 말을 나누눈 일이 종종 있었다.


# 갑니다, 가요, 해가며 배드민턴을 한 다음에는 트랙 위를 달렸다.


# 나느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거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라고 훌쩎거리며 말하다가 코를 닦고 국수를 마저 먹었다. 세탁기가 탈수를 마쳤다고 조그맣게 알람하고 있었다.


#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벌판의 어둠이 그림자를 빨아들이고 그림자가 어둠에 이어져,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씨의 그림자인 듯 했다.

무재씨.

하고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묵묵히 수그러진 무재씨의 고개위로 불빛이 번져 있었고 그 너머로 바로 어둠이 내려와 있었따. 막막하고 두려워 사발 모양의 가로등 갓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어쩌면 입일지도 모르겠단느 생각이 들었따. 어둠의 입, 언제고 그가 입을 다물면 무재씨고 뭐고 불빛과 더불어 합, 하고 사라질 듯했다. 

무재씨.

무재씨.

걸어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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