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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pr 10. 2024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박노해시집,

박노해선생님의 글은 하나하나 버릴것이 없다.

아 이 고리타분한 첫글의 시작이여.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저 문장은 사실이자 진리인것을.

정호승님의 문체를 닮고싶어서 한참 필사를 한적이있다. 사실 박노해님의 시도 하나씩 생각이 날때마다 꺼내먹을수 있는 미니 에너지바 였으면 하는 생각을 여러번했다.

하나씩하나씩 시간날때마다 꺼내서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으면 내것이 되는 시. 생각만 해도 너무 신난다. 그만큼 닮고 싶은 시인이다. 생각의 깊이도, 단호한 문체도, 사물을 보는 통찰력에 근거한 시의 소재도.


내가 꼭꼭 씹어 소화시켜야만 하는 시집. 그래서 시집이 얇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역시 천재였고. 그는 역시 소소한 일상과 역사를 버무려내는 시인이었으며, 이 시집 또한 건너뛰며 읽을수 없어 결국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야 만다.


책의 제목이 좀더 파격적이었다면 박노해 시인님의 곳간이 좀더 부유해지지 않았을까. 목차를 짚어가다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독자들이여, 부디 이 시집을 사서 목차를 살펴보길. 어쩜 시의 제목들이 이리 훌륭한지. 수록된 시 542개 모두 책의 제목으로 쓰였으면 좋았을것을.


책의 양이 방대하여 오늘은 1/2만 필사할까 한다.


#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혼자있기를 좋아한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깊은 침묵을 좋아한다


나는 빛나는 승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의미있는 실패를 좋아한다


나는 새로운 유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고전과 빈티지를 좋아한다


나는 도시의 세련미를 좋아한다

그래서 광야와 사막을 좋아한다


나는 소소한 일상을 좋아한다

그래서 거대한 악과 싸워나간다


나는 밝은 햇살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둠에 잠긴 사유를 좋아한다


나는 혁명, 혁명을 좋아한다

그래서 성찰과 성실을 좋아한다


나는 용기있게 나서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떨림과 삼가함을 좋아한다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를 바쳐 너를 사랑하기를 좋아한다


# 작게 살지마라

내 힘으로 공들여서 쟁취하지 못한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받는데 익숙해지면

늘 받기만 바라는 존재로

퇴화해 갈 것이다


쟁취하라, 오직 자신의 힘과 분투로

그리하면 두가지를 얻게 될것이다


쟁취한 그것과

언제든 새로운 것을 쟁취할 힘과 가능성의 존재인

자기자신을


작게 살지 말아

작아도 작게 살지마라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따라가다보면

소소한 것들이 기쁨이 되고 고통이 되고

소소하 것들이 전부가 되고 상처가 된다


작게 살지 마라

지금가진 건 작을지라도

인간으로 작게 살지 마라


# 광야의 밤  

광야의 밤은

어둠이 크다


오늘 밤은

야생화 요를 깔고

별 이불을 덮고

바람의 노래로

잠이든다


그대만 곁에 있으면

좋은 밤이련만


# 한순간에, 눈보라처럼

창밖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방 안은 따뜻했고 아늑했고

그때 돌 하나가 날아와

우리를 감싸주던 유리창이

와장창 내려 앉았다


한순간에

눈보라 처럼 진실이 몰아쳐왔다


한꺼번에

차단된 생의 진실이 엄습해왔다


# 늘 단정히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낡은 옷을 빨아서 풀을 먹이고

숯불 다리미로 다려 입혀주며

어머니가 당부하셨다


아들아, 오늘부터 넌 어엿한 학생이다

늘 마음을 밝게 하고 시선을 바로 해야 쓴다

아비없는 자식이라고 몸가짐과 옷차림마저

단정치 못하면 그건 네 탓이다

가난과 불운이 네 눈빛을 흐리게 하지 말거라

이제 너는 스스로 헤쳐 갈 창창한 학생이다


그날 아침 혼자서

타박타박 황톳길을 걸어 입학식에 가던 나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걸어 나가던 나는,

떨리고도 환한 마음으로 입술을 꼬옥 물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험한 조건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떠올려왔다

공장에서도 군대에서도 수배 길과 감옥에서도

내 처소와 살림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밝은 마음과 미소를 잃지 않고 시선을 바로하여

사람과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밥을 먹을 때도 마을 할 때도 글씨를 쓸 때도

걸음을 걸을 때도 늘 반듯이 하고자 애써왔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고달프다 하여

내가 할수 있는 내면의 빛과 소박한 기품을

스스로 가꾸지 않으면 나 어찌 되겠는가

내 고귀한 마음과 진정한 실력과 인간의 위엄은

어떤 호화로운 장식과 권력과 영예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으니


늘단정히

늘 반듯이

늘 해맑게


# 그 한사람

가을 나무 사이를 걸으며

먼 길 달려온 바람의 말을 듣는다


정말로 불행한 인생은 이것이라고


좋고 나쁜 인생길에서 내내

나를 지켜봐주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게 귀 기울이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나

길을 잘못 들어서 쓰러질 때에도

한결같이 나를 믿어주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가 고난과 시련을 뚫고 나와

상처난 몸으로 돌아갈 때에도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가 빛나는 자리에서나

내가 암울한 처지에서나

내가 들뜨거나 비틀거릴 때나.


나 여기있다, 너 어디에있느냐

만년설산 같은 믿음의 눈동자로

지켜봐 주는 그 한사람


내 인생의 그 한사람.


#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가슴속을 걸어 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마음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한순간 그날들로 나를 데려가겠는가


눈이 부시게 푸르던 우리 가난한 날에

눈보라 치는 밤길을 함꼐 걸었던

그 뜨거운 숨결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너는 이제 잊었다 해도

눈물어린 그 얼굴 애틋한 그 눈빛이

오늘도 내 가슴에 별빛으로 흐르는데


나에게 사랑은 한계도 없고패배도 없고

죽음마저 없는것


사랑은 늘 처름처럼

사랑은 언제나

지삭만 있는것

사랑은 끝이 없다네


# 미치지 못한 내 눈빛

서울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날리는데

덥수룩한 사내가 비틀비틀 다가와

담배 한개비 달라 손을 내민다


담배를 건네다 마주친 눈빛,

순간 번득이는 아득한 섬광,

스르르 되돌아오는 노숙인 몰골


어둠 속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어 흔들리느니


저 미친 듯한 사내의 정신은

무방비였고, 맨바닥이었고,

하여 시대의 광기와 모순을

벌거벗은 영혼으로 맞았구나


나는 비겁했구나

내 상처 깊은 곳까지 갑올을 입고

미친 세계를 미치지않은

정신으로 살아남았구나


무장해제하지 않은 내 정신은

미친 시대를 관통하며

미치지 않고 살아남아

저 추락을 비껴갔구나


어둠속 차창에 비치는

내눈동자를 묵시한다


이 미친 세계 한가운데서

잠입과 망명을 거듭하며

섬광처럼 번득, 내통하는

미치지 못한 내 눈빛



# 젊음은, 조심하라

젊은은, 조심하라


젊음은 무관의 권력이어서

그 자체로 인류의 절정이며

너무짧은 아름다움이어서

그대 가는 곳마다

유혹이 따르기 마련


젊은 너의 마음을 얻으려

온갖 위로와 재미를 바치며

화려한 유행의 분방함으로

고귀한 젊음을 탕진케 하리니


젊음은, 조심하라


시선의 눈총에 구멍난 영혼으로

우울하거나 휩쓸리거나

과시하거나 열폭하거나

자기중심의 얼음성에 갇혀

온기없이 시들어가리니


자기 자신을 잃지 말며

자기 안에 갇히지말라

그것은 서서히 자신을

죽여가는 것과 같으니


젊음은, 조심하라


# 다 공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고

힘주어 말하는 자들은

똑똑한 바보들이다


인생에서 정말로 좋은 것은 다 공짜다


아침햇살도 푸른하늘도

맑은 공기도 숲길을 걷는것도

아장아장 아이들 뛰노는 소리도

책방에서 뒤적이는 지혜와 시들도

거리를 걷는 청춘들의 시원한 자태도

아무 바람 없는 친절과 미소도

푸른 나무 그늘도 밤하늘 별빛도

계절 따라 흐르는 꽃향기도

그저 이 지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눈물 나는 숨은 빛의 사람들도


내인생의 빛나는 것들은 다 공짜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숫자로 헤아릴 수 없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삶에서 진실로 소중한 것들은 다 공짜다


# 행복을 붙잡는 법

우울한 기분으로 먹구름을 몰지마라

체념한 걸음으로 지구 위를 끌지 마라

냉랭한 마음으로 눈보라를 일지마라


좋은 이는 바로 가까이에서 걸어오고 있다

그가 지금 네 곁을 영원히 스쳐가고 있으니

행복을 붙잡는 법을 배워라


귀를 막고 걷지 마라

고개를 들어 앞을 보라

먼저 미소띤 눈인사를 건네라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가려보느느

안목과 지성을 길러라

저 별들 사이를 걸오온 고유한 빛을

알아보는 내적 식별력을 길러라


타인의 시선에 반쯤 눈감아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

상처받고 실망하는 걸 웃으며 견뎌내라


지금 이 지구에 단둘이 마주걷고 있다

오, 세상의 그 많은 사람과 조건이 다

배경에 불과한 순간이 지금이다


그가 바람같이 스쳐 지나간다

번개같이 뛰어가 조우하라

좋은 이는 네 곁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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