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주의보다는 합리주의를 지향하며
이불킥, 말 그대로 이불을 킥 한다는 이야기이다. 자기 전에 무엇인가 생각나서 몸서리치게 창피했을 때 쓰는 표현이며, 은어로 표현하자면 완전 쪽팔리는 행동을 저질렀다는 이야기.
오늘로써 만 나이 40을 채운 나는 인생의 목표가 점점 더 겸허해진다.
2분기 올해의 목표는 이불킥을 할 일 만들지 않기이다. 이불킥을 하기엔 너무 고상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뭐랄까. 여전히 마음은 삼십 대 초반인데(이십대라고 하려다 양심 있는 글쓰기를 위해 백스페이스바를 다다다 눌렀다) 이미 나는 살아온 경험치가 있으니, 주변의 시선에 '어른'으로 비춰져야 할 짬바가 온 것이다.
그래. 짬바를 고민하는 것 보니 네가 철이 들려고 하나보다. 하기사 진짜 더 이상 철 없이 살면 답이 없지. (이 대목에서 마른세수를 해 본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남들 다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왜 본인만 이렇게 더딘 것 같으냐이다. 내가 무슨 존 듀이의 후손도 아니고, 된장인지 아닌지 먹어봐야 아느냔 말이다.
존 듀이는 교육학적 사상가로 이름이라도 떨쳤지, 이렇게 경험주의로 가다가는, 친구말대로 파국이다.
이제 좀 합리주의로 방향을 틀어보자 좀.
이불킥 할 일 =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한 일. 생각해 보면 이불킥으로 집에 있는 이불 먼지는 다 털어 새 이불을 만들고 남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 이불 줄게 새 이불 다오. 그저 필자에게 모두 가져오면 될 일을.
그래. 슬프게도 나는 어른이다.
그래서 갈수록 단순하게, 본능대로 사는 게 어려워질 것 같다. 글도 쓰면 쓸수록 어려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또 때마침 도서관에 갔는데 일필휘지 한 시인들의 신간은 또 어찌나 많은지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지고.
내가 글은 일필휘지 하지 못할지언정 엄마로서, 선배교사로서,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로서, 아내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은 살아내야 겠다. 더이상 내가 나를 적당히 봐주면서 오냐 오냐 하며 지내기엔 어리광의 막차는 이미 떠나버렸다.
부디
오늘 보낸 내 막차가 날 깜박했다며 데리러 오질 않길. 막차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일도 없길. 부디.
본업에 충실하자. 본능에 충실하지말고.
더불어 오늘 나에게 사랑을 표해준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며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좀 더 당신들에게 나은 인간으로 다가갈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