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요일 엮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럼 이제 그만 좀 도와주지. 이제 도와줄 때도 되지 않았나?
왜 난 의연해지지 못할까? 왜 작은 파동에도 휩쓸리는 오리배가 되느냔 말이다. 내공을 쌓은 지 수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당신들을 잃고 얻음에 일희일비하는 어리석은 사람아.
매일 색다른 종류의 설움과 슬픔을 종류별로 먹어가며 삶의 폭이 넓어지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가.
그러기엔, 이미 차고 넘치는데.
내가 어디서부터 무엇을 잘못해 온 걸까?
그리하여 나의 독서의 계절은 시작되었다.
내 독서의 계절은 항상 이럴 때 찾아온다. 하늘의 뜻이라면 뜻이겠다. 결국 돌아오는 곳은 내 데스크에 앉아 책을 보고, 또 책을 읽고, 눈물짓고, 시간과 함께 흐르는 작은 몸뚱이와 함께 희미한 비소를 짓는 것.
뭐 나쁘진 않다.
사실 이럴 때 책이 잘 읽히는 것은 사실이니. 어떻게 보면 하늘이 돕는 것일 수도.
괜찮아, 지나갈 거야, 또, 그런 것뿐이야. 자책하지 마. 숨을 크게 쉬어.
# 무화과 숲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박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나 나오지 않았다
옛날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너는 봄이다 - 박신규-
네가 와서 꽃은 피고
네가 와서 꽃이 피는지 몰랐다
너는 꽃이다
네가 당겨버린 순간 핏줄에 박히는 탄피들,
개나리 터진다 라일락 뿌려진다
몸속 거리마다 총알 꽃들
관통한 뒤는게 벌어지는 통증,
아프기 전부터 너는 피어났다
불현듯 꽃은 지겠다 했다
죽을 만큼 아팠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찔레향에 찔린 바람이 첨예하다
봄은 아주 가겠다 했다
죽도록, 이라는 다짐은 끝끝내
미수에 그치겠다는 자백
거친 가시를 뽑아내듯 돌이키면
네가 아름다워서 더없이 내가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때늦은 동백 울려 퍼진 자리
때 이른 오동꽃 깨진다. 처형처럼
모가지째 내버려진 그늘
젖어드는 조종소리
네가 와서 봄은 오고
네가 와서 봄이 온 줄 모르고
네가 와서 봄이 왔다
이봄에 와서야 꽃들이 지는 것 본다.
저리 저리로 물끄러미
너는 봄이다
# 우산 -박연준-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 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꺠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 들을 집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 높새 바람 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 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 바람 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 작 별 -주하림-
혐오라는 이름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모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 번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람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도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 눈물의 중력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거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 안으로 말아 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대해 옷장의 나방에대해
찬장에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고라니 -고 영-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이썽ㅆ다
문득 몹쓸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몸이지만 내몸이 아닌 네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 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는 위에서 숨통을 조여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짓 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