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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y 15. 2024

김애란-도도한 생활

김애란 님의 소설은 나를 공명 시킨다.

내가 표현할 수 없었던 무엇인가를 그녀는 표현해 낸다. 안개 같은 곳에서 헤매다가 갑자기 태양이 쨍하고 내리쬐는 곳으로 이동한 기분이 든다.

그녀의 소설은 세세한 묘사들이 가득하며,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심지어 나도 배꼽을 잡고 꺄르르 웃을 정도이다. (이 대목에선 집안 식구들이 날 보며 어이없어 웃는다.) 그러다가 또 금방 코끝이 시큰해진다. 하이퍼리얼리즘이면서도 상징적인 소설을 쓰는 그녀는. 정말 천재임이 틀림없다. 그녀의 소설을 거의 다 읽어봤지만, 하나 버릴 작품이 없다. 소설은 이런 거구나. 그녀가 쓴 모든 소설은 언제나 당신과의 첫 키스 같은 설렘을 가져다주는구나.


'도도한 생활'은 김애란 님이 단편소설로, '침이 고인다' 소설집의 한 단락이다.

이 소설에서 피아노가 주는 상징성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조금 어렵다. 그것이 이 소설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에 항상 묻어나 있는 상실, 가난, 해학, 한 스푼의 우울, 그것들을 난 사랑 한다.



가난한 작은 교회 목사 딸이라는 이유로(수식어가 많기도 하다) 난 피아노 학원을 공짜로 다녔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에겐 꽤나 이야깃감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배울 수 있음으로 감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소설 속의 '나'처럼, 피아노는 가난과 박한 일상에서 날 탈출시켜 주는, 날 지상으로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소설 속의 '나'처럼 나도 체르니를 '갖고'싶었고. 바흐가 없는 바흐 방에서 바흐를 연주했다. 음악이 하고 싶고 미술이 하고 싶었으나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들었다. 음악이 좋았고 그리는 게 좋았다. 피아노학원이 문을 닫는 날에는 교회에 가서 혼자 몇 시간이고 연주를 했다. 내 몸 안의 무엇인가가 피아노의 파동을 타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마치 마라톤 완주 뒤에 마시는 탄산음료 같았다.

 특히 낮은 음역대를 사랑하였는데, 그 울림이 좋아 혼자서 몇 번이고 두드리고 듣고를 반복하였다. 낮은 음역대가 좋아 첼로를 배우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콘트라베이스까지는 바라지 않았다.(낮은음이 주는 무게감, 떨림, 그늘짐, 우아함을 사랑했다) 악기점에 가서 첼로 가격을 혼자 알아봤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책을 폈다. 첼로를 사기엔 우리 집이 첼로만 했기 때문이다.


빨래를 개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통해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글을 써 나가면 오롯한 나를 만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


#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벽 사이로 오후의 볕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


# 연습실에서 내가 친 음이 정갈하게 사라지는 느낌을 즐기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찢어질 듯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이 들려오곤 했다. 베토벤은 귀가 먹어 그 소리를 못 들었겠지만, 나는 두 번째로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렸다.


# 나는 헨델이 없는 헨델의 방에서 음악을 했고, 엄마는 베토벤같이 풀린 파마머리를 한 채 귀머거리처럼 만두를 빚었다.


# 조율 안 된 중고 피아노는 모두 축농증에 걸려있었다.


# 엄마는 탈수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탈탈탈탈'울었다.


# 언니는 만두를 삼킬 때마다 엄마를 삼키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문득 스무 해를 넘긴 언니와 나의 육체는 엄마가 팔아온 수천 개의 만두로 빚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가전제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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