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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y 18. 2024

김애란 - 침이고인다

김애란 소설집


김애란님의 소설을 읽노라면 마음이 뭉클할 때가 많다.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껴서라기 보다, 그저 나의 삶과의 교집합 때문이다. 카타르시스야 당연한 것일수도.

내가 표현하지 못했던, 내가 붙잡아 두지 못했던 그 어렴풋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 놓으셨다. 아마 나와 같은 80년대생으로, 지나온 삶의 과정의 많은 부분이 겹치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의 섬세함이 참 좋다. 작은 사물을 묘사하는 그녀의 문체에 감동한다. 가난, 부재, 결핍에 대하여 다루어도 소설 자체가 그늘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와 함께 어려운 시절을 견뎌와 준 소설속 그들에게 감사할 뿐.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어떤 사실에 다가갔다가 상징화된 비유법을 통해 그 상황을 묘사한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한권을 책을 토막내어 감상평을 적을만큼, 단편소설 하나하나에 가벼운, 그러나 짙은 색의 힘이 실려있다.


작은 월셋방, 고시원의 묘사는 또 어찌나 아득하고 서글픈지, 오랫만에 나의 20대의 기억에 잠식되었다. 나만 고시원에서 두 발을 책상 속에 넣고 자본것이 아니구나, 나만 자취방 월세에 허덕여본것이 아니구나.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에게 받는 위로란 이런것이구나. 뭉클하고, 코끝이 시큰하고, 안도하게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


그녀가 연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나도 사랑에 빠져있던 그때로 돌아가보고, 그녀가 수험생에 대해 이야기 해보면 나 또한 임용시험을 치룰때의 고초를 다시금 상기해본다. 벅찬 가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아, 10년전의 나로, 5년전의 나로, 1년전의 나로. 나는 그렇게 책 한권을 두고, 감사히 인생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 성실함이란 미래의 실수를 위한 달란트 같은 것일지도 몰라, 벌금은 또 다른 의미의 허락이니까.


# 그녀는 후배를 선뜻 들인 나머지, 자신이 혹 오래전부터 어떤 요구와 결례를 간절히 기다려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 유구한 밥상


# 그녀는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후배가 저지르는 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렇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느순간 후배의 잘못에 환호했다.


# 서울은 고장난 멜로디 카드 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사내는 가짜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옆구리에 비빔면을 낀 채 하늘을 바라본다. 낮게 낀 구름 사이로 전신줄이 오선지 처럼 뻗어있다. 사내의 얼굴위로 눈송이가 떨어지며 스륵 녹는다. 악보를 지나 가장 낮은 음을 향해 내려가는 음표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만지면 따뜻할 것 같은 노란 눈이다.


# 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안내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의 크기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안에도 -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 네가 시골에서 올라온 것과 63빌딩이 63빌딩일 거라 상상하지 못하는것, 내가 한달에 11만원짜리 독서실에서 산 것이 정말이었던 것처럼. 그맘때 우리의 얼굴이 저녁 무렵의 63빌딩과 같이 전부 노랬던 것처럼.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 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 4인실은 너무 좁아 네명 모두 책상위에 의자를 올린 뒤 연필처럼 자야 했다. 여기저기서 부르르- 부르르-하는 삐삐 진동음이 들려왔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때론 간헐적으로 때론 연이어서, 마치 풀벌레가 소리죽여 울듯. 우리모두가 한마리 풀벌레들 인 양. 돌이켜보면, 그것은 독서실에서 가장 많이 나는 소리이기도 했다.


# 신림- 하면 푸른 숲이 떠오른다. 나무가 많은 숲 그리고 젊은 숲. 그 숲의 나무들은 모두 지하철 2호선을 표시하는 연녹색을 띠고있다. 보통의 나뭇잎은 그보다 짙지만 어쩐지 신림의 나무들만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신림, 하고 소리나면, 먼곳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흔들리며 '수풀림, 수풀림'하고 울어대는 것같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구파발이라 읊조리면 내 가슴 어딘가에 꽂힌 붉은 깃발이 마구 펄럭이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신림 진짜 구파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언제는 우리 세기가 '공사 중'이 아니었나 싶다.


# 잘지내, 언니가 손을 흔든다. 창밖으로 작아져가는 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나보다 키가 작은 언니. 매연속에 안긴 언니. 멀어져가는 신림. 그곳의 마른나무, 건물, 간판, 불면, 청춘, 겨울이 내 뒤에 있다. 몰랐지만 늘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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