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May 25. 2024

편혜영 - 홀

인생의 공동(空洞)에 대하여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마음에 공동을 파는 것이다. 이것은 자발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타의적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타의를 가장한 자발적 행위이다. 한 삽, 흙을 퍼다 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결국 그것이 커다란 구멍이 되는 것. 한 삽의 흙이 가지는 유의미에 대해 깨닫고 나니, 이 책은 더 없는 스릴러가 되었다.

원래의 장르도 스릴러지만, 스릴러를 더 스릴러답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이 책 속에 쓰여있다.


소설 초반부부터 중후반부 까지는 주인공 '오기'의 입장이 되어 책을 읽게 된다. 점점 고립되는 '오기'의 심정에 몰입하게 되고, 오기의 시선으로 아내를 폄하하게 흘러간다. 오기의 눈에 장모는 그저 딸의 죽음에 미쳐버린 노인이 되고, 자신은 이제 막 자수성가하여 빛을 발하는 시점에 엄청난 사고를 당한 불운의 남자로 비추어진다. 그래서 독자들은 초반부에는 오기의 시선으로 책을 읽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되려 오기의 시선이 아닌 제삼자의 시선이 되어 오기의 인생을 조망하게 된다.


오기는 결국 자신을 폄하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었으며, 아내의 공동에 자신이 큰 부분 기여하였다는 것을, 죽기 전에(아마도 죽기 전 일 것이다) 깨닫는다. 

커다란 맥락은 인생의 공동에서 오는 두려움과 회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세부 묘사는 또 얼마나 뛰어난지 마치 내가 식물인간이 된 것 같은 답답함이 몰려오고, 당장이라도 장모에게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장모는 왜 소파를 버렸으며, 아내의 서재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을까. 왜 오기가 전화를 하지 못하게 전화기 코드를 뽑았으며, 마당의 커다란 나무까지 송두리째 뽑아버렸을까. 

후반부로 갈수록 아내의 시선에서 오기를 바라보게 되고, 결국 장모가 하고 있는 행동들의 원인이 과거의 오기에게서 비롯되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등골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게 된다. 


나는 타인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인생의 정원에서 한 삽, 한 삽 흙을 파내고 있지는 않은가? 결국 그 결말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외면한 채 말이다. 왜 우리는 서로를 미치게 하는가. 왜 우리는 공동이 될 줄 알면서도 허겁지겁 삽질을 하며 가슴에 구멍을 내고 살아가느냔 말이다. 다 알면서도. 결국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 채.




# 그 밤의 빛은 지금 오기가 누워 있는 병실만큼이나 밝고 환했다. 불빛 때문에 잠을 뒤척이더라도 침실의 형광등 역시 밤새 끄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새벽에 오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전등이 모두 꺼져 있었다.

도대체 그 빛은 언제 사그라든 것일까.


# 오기가 생각하기에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 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 대야 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 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 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이거야. 오기는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장을 하라거나 자기 자신이 되라는 충고만큼 어리석은 게 없는데, 오기가 바로 그 잘못을 저질렀다. 오기가 얼마나 서툰 인간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내에게 말이다.


# 장모는 아내가 쓴 것들을 모두 찾아 읽을 것이다. 딸이 그간 말하지 않은 많은 얘기들을 알게 될 것이다. 노트에서, 가지런히 모여있는 메모에서,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포스트잇에 적힌 글을 통해서 장모는 오기에 대해 아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다스케테쿠다사이


# 장모가 불러 모았어요 나한테 전화했어요. 오기가 왼손으로 제이를 꽉 잡았다. 다. 시. 와. 줘.라고 천천히 말했다. 알아들은 걸까.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나 아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기 스스로 그렇게 했다. 교통사고 당한 일을, 그 사고로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걸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인생이라는 걸 어렴풋이 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삶을 살아온 동시에 잃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 제이와의 일은 오기가 손쓸 수 없는 과거의 일이었다. 명백히 오기의 삶이었지만, 오기는 과거의 제 삶으로부터 골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 오기는 무력해졌고 내부의 공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이 아예 빠져버릴 것 같았다. 시야를 가로막은 커다란 앞차가 구멍처럼 보였다. 오기는 삶의 애착이 심했지만, 그 순간의 무력감 역시 오기의 것이었다.


#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애란 - 침이고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