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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y 26. 2024

오십 미터 - 허연 시집


시가 슬퍼서 우는 건지, 한 살 더 먹은 나이 탓에 센티멘탈만 더해져 눈물이 나는지.

시집을 읽다가 울다가 웃다가 멀리 봤다가 잠깐 웅크렸다가 석고상처럼 있다가 물도마셨다가 다시 앉다가 시집을 더 이상 못 읽겠다 싶어 덮었다가 다시 폈다가 책장을 넘겼다가 빨간 눈으로 입을 삐죽거리다가.


사실 허연 작가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사전조사를 많이 하였다.

허연 님의 출생은 어떠하였는지, 그의 시대적 배경과 주변 환경은 그의 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씩 풀어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그저 당신들과 함께 읽어보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을.


새로운 인연에게 종종 책을 선물하는 습관이 있는데,

한동안은 이 책이 선물이 될 것 같다.




# 아나키스트 트럭 1

슬픈 사람들이 트럭을 탄다. 트럭은 정체에 걸릴 때마다 힘겹게 멈췄다. 정체가 풀리면 트럭은 부식된 하체 어디선가 슬픔을 흘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두 손으로 신을 그려보지만 이내 슬픔이 신을 덮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


찌그러지고 때 묻은 트럭은 세월을 등에 업고 생의 마지막 질주를 했다. 낙오한 사람들은 어느새 세월의 등에 올라타 있었고.


도시는 어두웠고 트럭은 주저앉았다.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주저 않은 트럭은 도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밤이 왔다. 이미 어두웠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안녕, 트럭.


#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 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은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 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 거진

당신이 사라진 주홍빛 바다에서 갈매기 뗴 울음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선 오지 않는다. 막 비추기 시작한 등대의 약한 불빛이 훑듯이 나를 지워버리고 파도 소리는 점점 밤의 전부가 됐다.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은 그렇게 파도만을 남겼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파도 위로 가끔 별똥이 떨어졌다. 바스락거리던 조개들의 죽음이 잠시 빛났고 이내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는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거진.


# 천호등 - 장마 7

후회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는 뻘에다 완성되지 못한 낱말들을 적었다. 생애를 다 볼 수 없었으므로


그 여름 낮게 날아가는 새들은 지저분한 털뭉치 같았고 강 건너에선 기울어진 매운탕집 간판들이 울먹이고 있었다. 반지하 방에서 기침을 하던 너의 슬픔을 가져오지 못한 게 아주 오래 아프다. 스물여섯 살. 천호동엔 비가 샜고 낡은 관악기 같은 목젖에선 피가 새어 나왔다. 눈앞에선 여름내 동쪽에서 왔다는 부표들이 소혹성처럼 떠올랐다. 아침이면 아무르에서 왔다는 새를 보러 가곤 했다. 그 해, 고양이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나팔꽃들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만 아프자고 너는 떠났고 나는 질퍽이는 뒷골목을 걸어 강으로 갔다. 마음의 짐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놀라운 강의 밀도.


# 좌표평면의 사랑

(좌표평면 같은 아일랜드의 보도블록 위를 노면 전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백 년쯤 된 마찰음이 빈속을 긁고 자본주의는 싸구려 박하사탕을 빨고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숫자를 믿어왔다.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그래프다. 환각의 정도를 나타내는 그래프. 두 명의 상댓값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보여주는 그래프. 머릿속에서는 수식이 흐르지만 그래프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좌표평면 위의 사랑.


힘들게 찾아온 사랑이라고 힘들게 가라는 법은 없다. 아무리 어렵게 온 사랑도 그래프 위에선 명료하다. 정점에 선 순간 소실점까지 내리꽂는 자멸.


좌표평면에선 언젠가는 모두가 떠나고 새 판이 그려진다. 소중한 것을 너무나 빨리 내려놓는 재주. 이곳의 미덕이다. 계절풍이 불었다.


# 들뜬 혈통

하늘에서 내리는 뭔가를 바라본다는 건

아주 먼 나라를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들뜬 혈통을 가진 자들은

노래 없이도 노래로 가득하고

울음 없이도 울음으로 가득하다


짧지 않은 폭설의 밤

제발 나를 용서하기를


심장에 천천히 쌓이는 눈에게

파문처럼 쌓이는 눈에게

피신처에게까지 쏟아지는 눈에게

부디 나를 용서하기를


아주 작은 아기 무덤에 쌓인 눈에게

지친 직박구리의 잔등에 쌓인 눈에게

나를 벌하지 말기를


폭설에 들뜬 혈통은

밤에 잠들지 못하는 혈통이어서


오늘 밤 밤새 눈은 내리고

자든지 죽든지

용서는 가깝지 않았다.


#FILM 2

신은 추억을 선물했고 우리는 근본이 불분명한 젤리를 씹으며 참 많은 것을 용서했다 가끔씩 어떤 끔찍함이 탄환처럼 빠르게 삶을 관통하고 지나갔지만 뜨거움은 그때뿐이었다


탄환을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태생적인 방관자들이 부러웠고 느티나무의 실어증이 부러웠다 그날그날의 슬픈 방을 찾아들어가며 우리는 울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수만 년 전 조상들이 이러했을까 그들도 눈을 맞으며 울었을까 아무것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밤새 울었다 따뜻한 오줌을 누며 방점을 찍듯 깜빡이는 가로등에 기대 느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십만 년동안 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밤새 눈은 연옥을 덮고 있었다.


# 祭儀 (제의)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게 많은 사람이다. 폭우 지나간 철제 다리 위로 이국처럼 노을이 진다. 쓰레기봉투 몇 개 떠다니는 몸집 불린 강을 내려다본다. 오늘도 강에선, 누구는 몸을 던졌고 누구는 떠올랐고, 누구는 몇 달 도 못 갈 사랑을 읊조렸다.


제물은 늘 필요하다. 몇은 이번 장마의 제물이 됐고, 한 겹의 뻘이 되어 하구 모래톱에 쌓였다.


영역 다툼에 지친 물새들 줄지어 지나간 모래톱. 병든 고양이가 다 포기 한 듯 졸고 있다. 고양이는 이번 장마의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이다. 그에게 지금 이 짧은 햇살은 냉정하게 따사로울 것이다.


이곳에선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슬픔도 기쁨도 없다. 쓸려갈 것과 남은 것, 그것만이 가능하다. 검은 구름 저편에 속삭이듯 어둠이 온다. 오늘의 제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떠내려가다 강둑에 멈춰 선 컨테이너 조각엔 마지막 낙서가 흐릿하다 새 뗴가 날아올랐다


# 장마의 나날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통 써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것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 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쓸어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모르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가서 더는 볼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 조개 무덤

여자애는 솔새만큼이나 작았지만 바다만큼 눈물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를 처음 봤던 날 방파제 보안등 아래서 우리는 솜털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그날 여자애의 동공 속에서 두려운 세월을 보았고, 얼마 안 가 그 세월이 파도에 쓸려 가는 걸 봤다.


살고 싶을 때 바다에 갔고, 죽고 싶을 때도 바다에 갔다 사라질세라 바다를 가방에 담와 왔지만 돌아와 가방을 열면 언제나 바다는 없었다


상처를 훑고 간 짠 바닷물이 절벽에 밀회를 그려 넣었고 몇 해가 흘렀다. 그 옆엔 은밀한 새들이 둥지를 틀었고


파도는 뼈속에도 결을 남겼다. 잊어버릴 재주는 없었다. 바다는 우리들의 패총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밀회를 바닷가 무덤에 두고 왔다. 뿌연 등대가 우리를 도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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