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심한 엄마다.
최소한 근 2년은 그랬다. 아이는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첫 아이를 낳았다. 서른 살이 채 되기 전에 둘째를 낳았다. 삼십 대의 8할을 육아에 올인했다. 남은 2할은 학교에서 사용했다. 마냥 사랑스러웠고 마냥 귀여웠다. 때론 도망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원망했다. 많이 울었고 많이 웃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냈다.
최선을 다해왔다. 모든 육아서적을 섭렵했고, 이유식과 유아식을 죄다 만들어먹였다. 사랑해 주고 또 사랑했다. 나를 잃었으나 상관없었다. 아이가 내 전부였다.
그러다 손이 점점 덜 가기 시작한다. 맨 처음 혼자 이를 닦고, 혼자 샤워를 했던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다. 혼자서 등하교를 하고, 버스를 타고 활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한다. 서운하지만 대견하다. 엄마가 조금 늦는 날이면 식사도 제법 잘 꾸려 먹는다. 그렇게 나의 아이는 어른이 돼 가고 있다.
나의 삶 또한 많은 부분이 변화되었다. 아이와 정서적 유대감이 줄어든 대신, 친근감과 친밀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내 다리를 붙잡고 아무 곳도 가지 못하게 했던 녀석들이 '토스'통장에 용돈 좀 넣어달라며 눈치를 준다. 감정적, 신체적 에너지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이랬는지, 아니면 이렇게 변한 건지,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교 후에 혼자서 멍하니 사색을 즐기는 시간도 포함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풍요로워짐에 죄책감을 느꼈다.
어제 23시에 큰아이가 나를 급하게 불렀다.
혼자서 커다란 숙제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방에 가보았더니 마인드맵을 한가득 편집해 벽면을 채워놓았다.
사회숙제라고 했다.
눈물이 났다.
칭찬을 해주고 요란법석을 떤 뒤 방으로 들어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아이는 며칠 전부터 사회 마인드맵을 그려야 한다고 왕왕 나에게 언질 하였다. 당연히 도와달라는 이야기인걸 알고 있었고.
난 그저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나에게도 나만의 하루 루틴이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때로는 멍 때리는 20시부터 22시까지의 시간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잘해오는 녀석이라 작은 숙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었다. 알아서 또 잘하겠지.
아이방을 열고 들어가 보니 세상에. 언제 이걸 다 혼자 편집하고 개념을 분류했을까.
엄마는 방 안에서 데굴데굴 하고 있는데 이 녀석 혼자 방 안에서 끙끙댔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대견함과 미안함 그리고 아이가 훌쩍 커버렸다는 데에 일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이대로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커서 날 이해해 줄까? 고유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여줄까? 사실 확신이 서질 않는다.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 조차도 잘하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든다. 이 아이는 날 이해해주지 않을까, 설령 훗날 내가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해도 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지는 않을까.
그만 눈물을 훔치고 바로 앉았다. 앞으로도 친구같이, 언니같은 좋은 엄마가 될 수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아이의 마인드맵이 훌륭한 만큼이나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