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시인선 105번이신 이사라 님의 시집이다. 100번대 시선집이란 이야기는 시인의 첫 출판이 그만큼 오래되었단 이야기다. 시인들 중에서도 대 선배님의 역할을 하지 않으실까 짐작해 본다. 300이나 400번대의 시집만 주로 읽어왔던 터라 조금 겁이 났다. 현대의 시류와 조금 거리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글로 가득 차 있었다. 울컥이던 마음이 잔잔한 바다가 되었다.
허연 님의 시집과 비슷하게 사랑을 모티프로 한 시 들이 많다. 그래서 좋다. 꼭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고차원적인 시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연 님의 시집보다 조금 더 여성스럽고 더 온화한 느낌의 시들이다.
시집을 읽으며 상념을 버리게 되고, 남을 용서하며, 위안을 얻는다. 더불어 시집의 한 글자 한 글자는 내 몸에 스며들어 나만의 자양분이 된다. 읽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 살짝 건널 수만 있다면
숲속에서 길을 잃는다면
나무들이 침묵할 때 길을 잃는다면
길들이 뱀처럼 감겨져오고 날이 저물어갈 때 길을 잃는다면
새 한마리의 그림자라도 만나야 할 텐데
여전히 길을 잃는다면
포도나무 올리브나무도 없는
나라에서 길을 잃는다면
지금은 낯선 수요일, 아니 금요일, 아니 월요일
길처럼 보이는 구멍마다 함정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리게되어
드디어 나는
깊은 허무에 빠져버리는 것이라면
그러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손목 잡힌 채
살짝 건널 수만 있다면
# 곁에서
밤이 뜨겁다
네가 아프다
나는 너의 아픔 곁에서
너를 본다
죽을 것같이
말라가고
초라해지는 살믕ㄹ 두고
네가 운다
나는 너의 울음 곁에서 너를 본다
두손을 모으며
너에게 고온하지만
방관자인 나는
너를 볼 수 있을 뿐
마으이 한 장 한 장
유리창 처럼 부서져
너의 사방을 위험하게 할 뿐
곁에서 어쩔 줄 모를 뿐
마지막 사랑 가지고도
닿을수 없는
네 곁에서
내가 살아간다
# 장례식장에서
내가 죽지 않아도 죽는 죽음이
여기 있다
마음에 노을이 진다
다행한 일이다
나와 나 사이에 국화 꽃이 천만송이도 더 피었다 진다
# 잠시
네가 나무일 때
너는 도망을 못가고
길게 뿌리만 내렸다 끝도없이 내려갔다
잠시, 이려니 하고
네가 울타리 일 때도
너는 도망을 못 가고
네가 엄마일 때도 너는 도망을 못 가고
손길일 때도 사막일 떄도 도망을 못 가고
잠시는 자꾸 길어져 굵은 사슬이 된다
마음 꼭대기에서
너는 이제 막힌 숨구멍 앞에
잠시를 드디어 내려놓는다
다른 나무들도 도망 못가는 그길에, 잠시를
# 뭉텅
살다보면 뭉텅 내려앉는 순간이 있다
나는 없어지고
내 그림자가
하나의 공감을 만든다
불투명한 심연으로 무너진
나를 다스리는 시간들이
긴장을 한다
계절도 흘러가면서
배경을 흔들고
녹음 지면서 나무들 뭉텅 내려 앉고
물위는 투명하고
짙은 햇살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동안
그림자 속 진심이 불투명한데
뭉텅 가슴 아픈
# 노을
너멀리 노을이 저혼자
붉어지다가
어느새
길게 손을 뻗어
나를 물들게 한다
눈 깜박할 사이
사랑할 사이도 없이
노을 속으로
말없이
옮겨 앉는다
# 한숨 자는 사이
분노가 일 때는 한숨 자고 생각하라는 그대여
그대로 인해 오늘 하루도 난 잠만 잤다
잠속에서도 잠만 잤다
잠깐 깨어났어도 눈은 떠지지 않았고
분노는 눈꺼풀 위를 현란하게 날아다녔다
밖은 출렁이고
안은 침몰중이고
비바람은 불고
바람끼리도 못 빋겠다고 운다
우는 바람들이 우는 일 말고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대신 생각해주어야지 마음먹다가도
나도 따라 울고 싶어지는데
한잠 자는 사이에 한숨은 너무 깊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