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장편소설
세 친구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막 오십 살이 되려는 참이다.
사실 무라카미의 소설처럼 엄청난 메타포가 담긴 이야기는 아니다. 문장을 구사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기보다 서사 위주의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으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소설 속의 난주처럼, 정은처럼, 아이들은 훌쩍 자라 버려 주말엔 오롯한 내 시간을 갖고는 한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잠깐 에어컨을 끄고 선풍기 바람을 맞는다. 블루투스 스피커의 볼륨을 조금 올린 뒤 불려놓은 미역을 자박자박 씻어 막 끓은 소고기 육수에 퐁당퐁당 넣었다. 시든 꽃에 물을 준다. 왁자지껄한 식사보다는 단출한 간편식을 챙겨 먹는다. 좋아하는 주광등을 켜고 앉아 친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이 듦에 대해, 잊을 수 없을 만큼 짙은 과거의 어느 단편들에 대해.
그래도 오늘은 왠지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모두 이 책 덕분이다. 산다는 게 그렇지 뭐, 나이 든다는 것도 마찬가지야, 하며 내 곁에 어깨를 붙이고 누군가 기대 오는 것 같다.
학교를 두어 번 더 옮기면 이제 곧 나도 오십 대의 반열에 오른다고 생각이 들어, 젊음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 며칠 고민하였다. 사실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내일이 두려워 챙겨 먹는 것 같고, 나이 든 내일이 두려워 사랑하는 것 같다. 마치 기근에 대비하는 왕국의 비상사태같이 나이 듦이 두려워 운동하고, 먹고, 자신을 검열한다.
그런다고 지구가 반대로 자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난주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없었다.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온 정신을 쏟았다. 그것만이 자기가 할 일이었고, 그것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난주는 그 시절의 정은이나 미경이 어떻게 지냈는지 몰랐다. 그런데도 정은과 미경을 자신을 내치거나 버리지 않았다. 다시 말을 섞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고마운데, 고마워서 좋은데, 어쩐지 이 둘에게 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 어깃장을 부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서글퍼지기 싫어서 더 그랬다.
# "나를 사랑한 거 아니었어?"
성희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경은 절망스러웠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느냐는 질무도, 사랑하고 있다는 확인이나 증표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후회되었다. 한심했다.
# 난주는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르네상스 그림을 배우는 게 도대체 자기 인생에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아니 자기 스스로를 외롭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평일 오전에 안경을 쓰고 필기까지 하면서 공부할 일인가 싶었다. 위악은 그만 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감추는 일이 자기를 더 외롭게 만든다는 걸 깨끗이 인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