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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Jul 12. 2024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안희연, 황인찬 엮음

휘몰아치는것이 소설이라면, 한숨 한숨 호흡하며 읽을수 있는 것이 시집이다. 시의 편식을 막기위해 시선집을 주로 읽었었는데, 갈수록 하나의 시인이 쓴 시집이 좋다. 이번 시선집도 어쩔수 없는 편식때문에 고르긴 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식하며 읽었다. 반성한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을 가리고 읽어도 누구의 시 인지 알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길에가다 소중한 인연을 만날 때 처럼 기쁘다. 이것 또한 시선집을 읽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과 삶에 대해 다룬 이 시선집은, 말랑말랑한 시들과 겸손하고 단촐한 시, 다소 어두운 시 등, 시의 장르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누군가가 그립다면, 혹은 누군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한권쯤 건네줘도 괜찮은 시집.


마음에 드는 시 몇편을 남겨놓고자 한다.



# 울창하고 아름다운  -리산

모퉁이를 돌면 말해다오 은밀하게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고


가령 저 먼 곳에서 하얗게 감자꽃 피우는 바람이 왔을 때 바람이 데려온 구름의 생애가 너무 무거워 빗방울 후드득후드득 이마에 떨어질 때 비밀처럼 간직하고픈 생이 있다고


처마 끝에 서면 겨울이 몰고 온 북극의 생애가 풍경처럼 흔들리고 푸르게 번지는 풍경소리 찬 바람과 통증의 절기를 지나면 따뜻한 국물 펄펄 끓어오르는 저녁이 있어 저녁의 이마를 짚으며 가늠해 보는 무정한 생의 비밀들


석탁 몇 조각 당근 하나 노란 스카프 밀짚모자 아직 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은밀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 다 알려지지 않은 무엇이 여기 있다고


# 두부 -고영민

저녁은 어디에서 오나

두부가 엉기듯


갓 만든 저녁은

살이 부드럽고 아직 따뜻하고


종일 불려놓은 시간을

맷돌에 곱게 갈아

끓여 베 보자기에 걸러 짠

살며시 누름돌을 올려놓은


이 초저녁은

순두부처럼 후룩후룩 웃물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좋을 듯한데


저녁이 오는 것은

두부가 오는 것


오늘도 어스름 녘

딸랑딸랑 두부 장수 종소리가 들리고

두부를 사러 가는 소년이 있고

두붓집 주인이 커다란 손으로

찬물에 담가둔 두부를 한모 건져

검은 봉지에 담아주면


저녁이 오는 것

두부가 오는 것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 슈톨렌 - 안희연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 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 호미  -안도현

호미 한 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는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 평을 나는 농사라고 했는데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것을 나는 당최 알지 못했다

나는 호미 자루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을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끔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했다는 것은 오래 기억해 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는 입동 무렵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헛간 시렁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 오래 만진 슬픔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넣어 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 사랑의 모양  -정다연

빛이 지나치다.


지나치게 네가 온다.

나는 구멍을 하나 가지고 있다.

언제든 널 숨겼다가 꺼낼 수 있는,


창에 기댄다. 체리처럼 번져오는 노을, 노을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사람, 색색의 플라스틱 빨대들, 그런 건 내가 훔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을 튼다

하루가 정직하게 차오른다

보고 있어

한 번은 말하게 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듯 네가 따뜻해진다면 좋겠다


회오리치는 빗물 배수관의 소용돌이, 합쳐지는 꽃잎과 이끼들,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너는 아니지만


흠뻑 젖게 된다.


기댄다.


네가 아닐 리 없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숨 막힐 듯 가득 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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