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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Jul 05. 2024

치치새가 사는 숲

장진영 장편소설

아니 에르노의 '여자아이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떠올랐다.

네가 떠올랐다.

나의 보석함이 기억났다. 나의 악취미 같은 사랑도.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음에 기뻤고, 이 책을 이해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래서 작가님이 미웠지만 좋아졌다. 나는 어째서 활자로 위로받는지, 한여름 장마철의 습도 같은 이 한 권의 책으로 나는 왜 마음이 고슬고슬해지는지.

그러다가도 왜 한없이 슬퍼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치치림 너는 어떤 어른이 되었니. 너의 삶은 지금 어떠니. 여전히 혼란스럽고, 냉소적이며, 자학적이고, 불안정하니, 아니면 정말 어른이 되어 이런 담담한 글을 쓰게 된 건지.

지금 그대와 함께라면,  너에 대한 이야기를 가까이서 나누었을 텐데, 너의 보석함에 대해, 치치새에 대해, 그리고 당신과 나의 보석함에 대해. 매일 뜨는 파란 달에 대해, 체리블라썸의 틴트에 대해.




# 트럭 가판에서 빨간 티셔츠를 사서 입었다. 물결에 더해시는 하나의 물방울처럼 공동체에 합류했다. 안전하고 수치스러웠다. 야릇하고 난감했다. 그날 대한민국은 독일에 졌다.


# 게가 되는 방법을 알려줄까? 언니가 물었다. 문득 목소리가 바로 옆인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옆에 다가와 앉은 게 아닌지 주변을 둘러봐야 할 정도로. '굳이 다음 생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죽으라는 건가. 뭔데?

많이 긁어, 벅벅 긁어 빠짐없이 전부 긁어 그러면 온몸에 딱지가 앉겠지. 언니가 냉랭하게 말했다. '게처럼'

"굉장하네"


#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하고 지금쯤 너는 물을 지도 모른다. 내 언니, 죽여버리고 싶은 나의 가엾은 언니처럼. 본론을 말해, 하고 윽박지를지도 모른다. 미안, 얘기가 너무 길었다. 화내지 말아 줘. 아직은.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야. 나는 예쁘지 않았다.


# 맨션에서 나온 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점점 빨리 걸었다. 전속력으로 달렸다. 벅차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울고 싶었다. 눈물은 슬플 때가 아니라 헷갈릴 때 나곤 하니까. 가슴속이 날갯짓하듯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내 몸 아예 갇혀 가슴뼈를 마구 주먹질하는 것 같았다. 짭짤하고 축축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달걀찜의 맛. 불이 아니라 마이크로파로 요리한 맛. 전무후무한 맛.


# 마음의 가장 작고 가장 연한 부분이 영구히 괴사해 버린 기분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해서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옷 가게 아줌마의 칭찬이 떠올랐다. 애가 참, 참을성이 많네. 영어선생님 한테도 하고 싶었던 말도 떠올랐다.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나는 옥수의 팬티를 벗겼다. 응, 나는 능숙했다. 썩 훌륭했다.


# 앞 유리에 꽃잎이 투신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벚꽃 잎은 가벼웠다. 창에 머물지 않고 금세 날아갔다. 벚나무가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소실점 끝까지 가루소가 이어졌다. 철제 사물함이 늘어선 복도, 자폐아가 똥을 싸고 뒷산에서 뱀이 내려오고 학주가 당구 큐대로 자기 허벅지를 두들기며 돌아다니는 복도. 내 인생이 그보다는 온화했으면 싶었다. 옥수의 괴성이 떠올랐다. 강당에서 본 옥수의 알몸도. 옥수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 사람들은 미안할 때 화를 낸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되고 싶지 않았다. 


# 요즘 나는 하루를 이틀씩 살고 있다. 시간이 병렬로 흐르기 때문이다. 20년 전과 현재가 페이스트리처럼 겹쳐서 동시에 흐른다. 참기 어려운 감각이다. 살갗을 긁는 걸 참기 어려운 것처럼. 어쩌면 피부의 독은 열이 아니라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기절은 삶을 공짜로 사는 방법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의식은 고통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양호실을 나왔다. 양호 선생님으로부터 관심은 받지 못했지만 삶을 공짜로 흘려보낸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고백이었다. 구애의 말이었다. 나는 차창밖에서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으로부터 이해받았듯, 이해한다는 말 없이 이해받았듯, 차장님을 이해했다. 뼛속 깊이 이해했다. 신경 하나하나가 연결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같은 종족이었다. 저그였다. 징그러웠다. 우리는 보석함에 끔찍한 걸 수집했다. 먼지가 앉지 않도록 매일 꺼내 닦아줬다. 차장님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건 나와 같아서였다. 차장님은 나였다. 


# 이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키스를 하고 손을 맞잡았다. 행복했다. 눈물이 흘러서 귓구멍으로 들어갔다. 사랑한다는 말이 물속처럼 들렸다.


# 고백건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나의 치치, 치치새는 찾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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