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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Jul 05. 2024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시집

" 사랑의 사건이 일어난 것을 몸은 감각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다 알 수 없어서, 망설이고 모호해지고 더듬거리는 말들의 세계가 있다. '생의 암호'를 풀 수 없어서 더뎌지는 말들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그 더딘 말들이 생의 '후방'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의 리듬을 찾아내는 데에 있어 오히려 기민한 언어들을 넘어 설 수도 있다. 그리고 이병률이다. 말이 더뎌지는 순간이야 말로 그 마음의 리듬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사랑의 사건은 그 시제가 결정되지 않았으며, '도래할 과거'와 '오래 전의 미래'로서의 사건이다. "- 박훈규- 


때론 머리말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시인의 약력도 꼼꼼하게 살펴보지만, 짧은 서평에 이끌려 구매하는 책들도 많다. 

생의 암호를 풀기 위해 시를 읽는다. 생의 후방에 있는 더딘 말들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가끔 눈물이 난다. 감탄의 탄식이 나온다. 아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도 있구나. 글로 이렇게 마음을 그려낼 수 있구나. 당신에게 이 책을 선물해 줘야겠다 마음먹는다. 사랑의 언어가 아닌 글들로 가득한 사랑의 시들이다.


# 시는 그런 것, 사랑은 그런 것,

춤을 춰야겠다는 목적을 갖고 춤을 추는 사람과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

굳이 밝히자면 내 이 모든 병은 후자에 속한다. 2024년 4월 이병률


# 명령

내 앞으로의 소망 하나는 길을 자주 잃게 해 달라는 것


절대 길을 안 잃어본 사람이라서

길을 잃을 거서 같으면 아예 발길을 돌려 되돌아 나오거나

잃은 길을 땅바닥에 회로로 그려본 다음

그 길을 가뿐히 빠져나온다는 것

그러니 그 못된 버릇을 영영 잃게 해 달라는 것


내 앞으로의 소망 하나는 자주 죽는 것


망하거나 창피한 일 앞에 매번 죽어 없어져버려

내가 다시 나를 접고 접어 수정하더라도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이번 한 번을 끝으로 다시금 생과 교차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


이제 내 앞으로의 소망하나는


뭔가를 그릇에 담아도 자꾸 새는 것

담으려 할 때마다 마음에 두었던 것을 쏟고

가득 출렁이도록 채울 때마다 암초에 부딪혀

지금이 언제인지를 잊는 것

다시는 생의 낯섦 앞에서 경악하지 않는 것


# 농밀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게 되었습니다


별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당신 눈동자가 흔들린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 누군가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갈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서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사랑

내디딜 발 하가나 없거나

끌어당길 손 하나가 없어도


두발이 다 없거나

두 손마저 다 없어도


도무지 전부가 마비되고 없다 해도


그리하여 마디마디 접붙일 것이 없기에 

다글다글 원하는 것이 없다 해도


# 장미 나무 그늘 아래

갑자기 여자가 남자를 껴안았다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자는 혼자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여자 품으로 남자가 파고들었다

남자는 곧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가만히 생각을 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 인간은 연습한다

길 한가운데 노인이 쭈글 앉아있다

차는 많이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차가 다니는 길이고

자세히 보니 이 길은 다섯 갈래 모두 차가 다니는 길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 안에서 노인의 등짝만 내다보고 있던 아는

어딘가 잘못된 사람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냥 멈춰 앉은 상태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신호가 바뀌고 바싹 그의 옆을 지나다

아무래도 노인이 위험하겠다 싶어 경적을 울리는데

빵빵거리지 말라고 노인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아예 그가 쭈그려 앉은 것은

쓰러져 누은 강아지 한 마리를 쓰다듬고 있어서였다


더워서 더는 걷지 못하는 강아지의 주인이었을까

아니면 차에 치어 숨을 놓는 중인 주인 없는 강아지였을까


한 덩어리의 무엇을 옮기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게 때문이지만


나도 며칠 전 꼼짝도 않는 종이 한 장을 높고

눈을 떼지 못한 채 울먹인 적 있다는 사실 하나를 

이 한 장면에 얹어도 될까


한 사람을 종이에다

그것도 흰 종이 한 장에 묻느라 혼곤했었다는 사실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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