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지음
자서전이며 소설이고 에세이다. 우생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이 통째로 녹아있는 장편드라마 같기도 하다. 초반부에는 이게 뭐야? 싶다가 점점 빠져들게 된다.
읽는 내내 반전의 반전이 거듭되어(나의 생각으론) 그리고 저자의 일생까지 엿볼 수 있어서 전혀 지루함 없이 읽혔다.
짧은 서평이겠으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책표지 뒷면처럼, 이 책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룰루 밀러의 생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 생물 분류학의 역사, 찰스 다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사, 사회학, 심리학, 퀴어, 세계 1차 대전까지.
이야기는 룰루 밀러 본인이 데이비드의 일생에 애착을 갖고 그를 탐구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처음엔 어? 들어본 사람인데? 허구의 인물인가 조사해 봤더니 실존의 인물이었다. 학과시간에 분류학을 배우며 얼핏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룰루밀러를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을 톺아보며, 아 이런 열정도 있구나, 이 사람은 이렇게 위기를 극복했구나, 저자와 함께 감탄해 나간다.
그러다가, 조던의 민낯까지 마주하게 된다. 물론 룰루 밀러와 함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실제로 꽤 이름 있는 과학자이다. 자연재해로 모든 결과물을 잃었을 때도, 아내나 자식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재개하고 포기하지 않는 투지를 보여준다. 그런 그는,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결국 무엇하나 분류하지 못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결국 이 책은 '분류'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와 나의 경계가 무엇인지, 인류나 집단이 범한 분류의 오류는 어디서부터 정정할 수 있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점을 시사한다.
중간중간 비유법이 재미있어 웃음이 터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산어류 라던지.
오랜만에 꽉 찬 책을 읽었다.
느긋하게 하루종일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시간을 선물해 준 동반자에게 감사하며.
#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하나의 거짓말만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 나는 언니가 어떤 자연의 요소로, 외로움과 눈물의 토네이도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했고, 눈썹과 속눈썹을 뽑아낸 언니를 보면 겁이 났다. 낯설어 보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강력한 슬픔이 내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살갗을 조금씩 베는 것으로 그 슬픔을 쏟아내는 편이 더 나았고, 그게 다였다.
#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주의를 끌었던 이유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 혀에 닿는 달콤함, 질서 정연함과 행위 주체성의 감각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그 거대한 세계는 조용히, 참을성 있게 앉아서 그가 틀렸음을 증명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 내가 이 연국의 감독이라면 무대디자이너에게 조금 살살하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도 무시해 버린 남자.
#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