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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18. 2023

콘트라베이스 - 파트리크 쥐스킨트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기원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독서를 하기에 좋아서가 아니다. 그저 하지에서 동지로 변하는 추분점의 일조량 탓에, 갑자기 불어오는 시베리아 기단의 찬바람 때문에, 이렇게 한 해가 저무는데, 난 어디쯤 서있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공허함 때문에 책을 집어드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기에 새 책을 집어 와구와구 디깅을 하는 것보다는, 집에 잘 모셔둔 애정하는 책을 한 권씩 집어 들어 다시금 여물질하는 그런 시간을 갖는 일이 소중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더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작가이다. 외부활동을 전혀 하지 않을뿐더러, 짧은 인터뷰조차 피하는 그런 작가다. 출판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으셨다. 가끔 상상해 본다. 그가 정말 흘러넘치는 글만을 책으로 펴내고, 평소에는 자기의 필명을 숨긴 채 과일가게에서 일하는 모습을, 세일즈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는 모습을, 

아마 외로운 사람일 것 같다.


그는 평범한 것을 범상치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범상치 않은 소재는 담담하게 서술하는 재주도 있다.

콘트라베이스는 전자에 해당된다.

중년남성의 모노드라마 소설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남성의 대화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3인칭 시점에 해당되지만 마치 옆에서 그가 자기 이야기를 곧장 들려주는 듯하다. 


악기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뒤엉킨 이 남자는, 악기를 자기의 심장처럼 비유했다가 갑자기 짐짝처럼 비유하기도 하고, 연인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콘트라베이스를 메타포로 하여 삶의 무게를 이야기 라도 하는듯한 이 소설을 읽노라면, 주인공인 무명의 남자와 함께 감정이 격해졌다가는 또 차분해지고, 함께 알 수 없는 것을 공유한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의 특징은

1. 악기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악기의 습성, 악기가 얼마나 예민한지, 덩치는 어떠한지, 어떤 소리가 나는지, 왜 꼭 콘트라베이스여야 하는지.

2. 콘트라베이스라는 비주류의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 

3. 뒤로 갈수록 중년남자의 감정이 격해진다. 그에 따라 솔직한 이야기가 오가게 되고(듣는 입장이나) 그의 진심이 어떠한지, 미스터리가 풀리는 쾌감이 전해진다.


개인적으로 콘트라베이스를 좋아한다.

그 묵직한 소리, 관을 통해 울리는 저음, 모든 악기들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우직함, 그리고 뗼레야 뗄 수 없는 그 현의 마찰음. 낮은음을 켤 때 울리는 저음의 괴성이 참 좋다. 튕기면서 연주할 때에는 어찌 그리 재즈와 잘 어울리는지. 

비주류라서 비주류가 좋은 나.




# 재즈밴드에서 베이스가 빠지면 연주음은 회화적으로 표현해서 폭발음처럼 사방으로 흩어져버리고 맙니다.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은 일제히 무기력해지고 말겠죠.


# 저는 제가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바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뿌리를 박고 있는 땅이지요. 그곳은 누구나 일체의 음악적 영감을 힘차게 빨아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음악의 씨앗을 허리춤에서 분수처럼 쏟아내놓으며 하나의 금자탑을 이루는 꼭대기입니다. 그게 콘트라 베이스지요


#  하나의 음이라기보다는 뭔가 절박한 것도 같이 바람결처럼 그냥 휙 지나가 버리는 소리 같은 거지요. 


# 마음속에 온 우주를 품고 있는 듯이 자로 잴 수 없을 만큼 넓은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런 속성을 다 밖으로 표출해 낼 수는 없지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 베이스의 온도를 적당히 유지해 주기 위해서 자동차를 혼자 몰고 다른 단원들보다 훨씬 일찍 길을 떠나 지저분한 여관으로 가거나, 난로가 있는 교회의 한구석을 찾아가곤 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눈사태가 왔을 때는 외투를 벗어서 이것을 둘둘 말고 제 체온으로 따뜻하게 안아 주었습니다. 


# 정신분석을 했다는 자체가 이미 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다 알고 있게 되었고, 정신 분석학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정신 분석학이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히드라처럼 자기 머리를 자기가 물어뜯어 버리는 형국으로 안으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정신분석의 모순에 휘감겨 스스로 질식해 버리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 소극적인 대처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극심하게 괴롭힌 끝에 사람들이 말하는 이 세상 최고의 슬픈 사랑을 읊을 수 있는 곳을 지어낼 수 있었던 겁니다. 


# 콘트라베이스라는 음악과 인생이 똑같이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위협을 느끼는 절대적인 무의 경지를 죽음의 상징으로서 분연히 투쟁하는 겁니다.


# 저는 종종 이것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톱으로 토막을 내고 싶기도 하고, 잘게 부숴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잘게 가루를 내거나, 톱밥처럼 만들어 목재를 가스로 바꾸는 기계에 집어넣거나,.... 아무튼 결판을 내고 싶기도 합니다.

제가 이 악기를 사랑한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 저는 음악을 아주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영혼과 정신에 따라 본질적으로 구성된 결정체 말입니다.


# 일찍이 괴테는 음악은 영원하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음악은 지극히 지고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해력도 그것과 같은 수준에 있을 수가 없고, 그것은 모든 것을 통치하며, 어누 누구도 감히 그것을 말로 설명하려는 용기를 갖지 못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 그 여자가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를 들으면,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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