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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14. 2023

소란, 박연준 / 오지은의 날 사랑하는게 아니고

친구가 선물을 보내왔다.

무방비 상태에서 받는 선물은 행복하다. 게다가 산문집이라니,

박연준 작가의 산문집이었다. 생소한 이름이었다. 약력을보니 2004년에 등단하신분인데, 2014년부터 꽤 많은 책을 내셨다. 문체가 아름다워 여성분이라고 으레 짐작하였는데 역시나였다.

사랑, 삶, 눈물에 대하여 예리하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관능적으로 묘사하시는것을 좋아하시는듯 하다.


같은 80년대 분임에도 불구하고, 금빛 실로 엮은 듯한 필력과, 삶에대한 관찰과 묘사를 이리 출중하게 하시다니, 존경스러울 뿐이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신분이라 다르신건가. 책을 쓰고, 시를 짓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묘사하시는 분들이 부럽다. 정말이다.


책에서의 사랑은 그동안 보았던 텍스트들과는 굉장히 다른결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 양지에 발을 들이는 일이 내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이든 사랑이든 생각이든 바르고 멀쩡하게 생긴것, 온화하고 근사한것, 떳떳하고 따뜻한것. 좌우 대칭에 맞춰 균형을 이루는 것이 힘들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단조인. 장조로 흘러가다가도 정신을 차리고보면 여전히 단조를 노래하는 낮은음자리표와 16분쉼표들의 숨가쁜 행진.


무릎이 꺾이는자 , 쪼그라드는 심장, 왠지 정호승 시인이 생각난다. 부드러운 문체에 녹아있는 그 단단함.

그리고 오지은의 노래또한 생각났다. (오늘따라 글이 두서가없다)


https://youtu.be/JI0MUURkKjg?si=KcXJ-dfg8IOE3_Vm

이 노래의 가사가 이책 한켠에 삽입되어도 크게 이질감이 없을것같다.

모든 시인들, 작가들, 싱어송라이터들, 모두가 훌륭한 예술가들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을 시각 혹은 청각으로 표현해주고, 미처 헤아리지 못한 감정을 도서관의 색인처럼 정리를 해준다.


오지은의 위의 노래의 가사도 마찬가지이다.

강하고 부드러운 가사와 일렉기타의 불협화음, 그리고 당장이라고 두 개의 목소리로 갈라질것같은 그녀의 음색이, 한편의 시와 같다.


소란, 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는 독자분이 있다면, 위의 음악도 함께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사부분은 생략하려고 한다.



잠시 소란 을 살펴보고 글을 맺으려 한다



#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니지 않고는 아무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뭔가를 느낄수 없어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려면 아주 강해져야 하죠.


# 나는 기울어지는 것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유별난 취미가 있고, 그것은 천성이나 성격과 관계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방은 서쪽, 사람은 어꺠가 한쪽으로 조금 기운 사람, 꽃은 말없이 피고지는 꽃, 꿈은 파닥이다 사그라지는 꿈이 좋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기울어지는 모든 것의 목뒤에 입술을 대고 싶어진다.


# D를 생각하면 지금도 슬픔을 압지로 누르는 것같은 기분이든다. 압지에 눌린 슬픔은 번지려다가 실패한다.

 

# 슬픔의 이유를 분명히 알아서는 안된다.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모든것을 정말로, 잃어버릴것같기 때문이다.


# 애인은 바둑을 좋아한다. 그는 대체로 검거나 하얗다.


# 자주, 그를, 바라보았다.


# 장담하건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불안했다. 실제로 내가 시를 쓰는 이유도 '불안'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불안하다. 도대체 뭐가 불안한가 물으면 할말이 없다. 나 자체가 불안이기 떄문이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인지 모르고, 가난은 자신이 왜 가난인지 모르듯이, 불안은 왜 자신이 불안한지 모른다. 다만 뿌리에서부터 가느다란 떨림이 엉켜잇을 뿐이다. 떨림, 내개 시는 항상 떨림으로 왔다.


# 그런데 보라. 어둠속에서 둥그렇게 등을 말고 옆으로 누워 있는 저 거대하고 못생긴 짐승은 죽이기엔 끔찍할 정도로 가엾다. 나는 아버지의 자는 모습에서 어떤 무구함을 봤다. 모든 잠은 무구하고 약하다는 걸.


# 겨울은 춥고 높고 길다.

지나간 것들만 따로 모아놓은 박물관 같은것이 있다면 어떨까? 입장료는 순도높은 그리움 한덩이. 그리움이 없는 사람들은 그 박물관에 들어갈 수 없다. 박물관은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에게 방을 하나씩 제공한다. 박물관을 지키는 문지기는 귀가 커다란 흰 백합들.


#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였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 잘도 걸어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무엇보다 나는 눈물이 차올라, 저절로 쏟아지는 일을 사랑한다.


# 글쓰기는 일종의 가학행위이자 어둠을 더듬는 행위다. 어둠속에서 벌어지는 조심스러운 애무다. 격정과 흔들림으로 어둠이 환하게 벗겨졌을 때 쓰는자는 비로소 능동적인 애무와 페티시, 사경을 넘나드는 황홀을 겪는다. 호흡과 리듬과 어둠이 삼위일체가 되어 서로 충분히 상피 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는 사람은 마침표 위에서 사정할 수 있다.


# 완성은 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꼐 오르다. 아래로 떨어 뜨리는 일이 내가 할수 있는 일의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 불러온다.


# 눈을 감고 오래된 터널을 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유년에 가 산다. 유년에서 아직 살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내가 불안을 느끼고 주눅이 들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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