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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05. 2023

슬픔이 주는 기쁨 - 알랭드보통

애드워드 호퍼의 외로움에 대하여

알랭드 보통의 에세이집이다. 그가 쓴 저서인 불안과 결이 비슷하지만, 더 쉽게 읽을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슬픔이 주는 기쁨에 자주 등장하는 애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몇장 첨부하였다. 그림을 보면, 글을 쓴 이가 왜 이그림을 언급했는지, 어떠한 맥락에서 그림을 언질했는지 대략적인 감을 잡을 수 있다.


슬픔이 주는 기쁨,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몇자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한다.

밤샘하는 사람들-나이트 호크


Morning Sun
outomat
주유소

그림의 주인공들은 모두 혼자다, 늦은 밤의 바에 앉아있는 중년의 남성, 늦은시각 일어난 텅빈방의 한 여자, 늦은밤 음식점의 여인, 동틀무렵 주유소의 남자. 

그들의 공통점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넘어선 공허함인것 같다. 그림 한장한장을 곰곰히 감상하면 마치 내가 그 공간에 들어가 있음을 느낀다. 또한 어두운 계열의 물감을 색칠해, 결코 경쾌하지 않은 광경을 그려내었다. 하지만 그의 붓에는 단호함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네가 침묵속에서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단색의 단조로운 방에서 존재 해야할 이유는 무엇인지, 누군가 낱낱히 알려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밤샘하는 사람들의 중년의 남자는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니다. 함께어울리며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만의 고독에 빠져있다. 그럼에도 혼자가 아닐수 있는것은 그 공간이 주는 개방감, 적당히 시끄러운 소리, 함께 걸터앉은 의자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외롭게 그러나 외롭지 않게 그 만의 생각에 잠겨있다. 때론 나도 저런장소에 있고싶다. 그의 고독이 부럽다.


침대와 무인식당에 있는 두 여자는, 말을 하고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야무진 입술을 꼭 다물고 있으며 지친 눈빛으로 무언가를 응시한다. 그게 창문밖에 걸린 태양이든, 커피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든.

그들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그 장소에서 오롯이 '나'이고 싶을 뿐이다. 그동안 엉켜잇던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들은 아마 누가 기척을 할때까지 그렇게 그곳에서 머물렀으리라.


이러한 복잡한 심경을 묘사한 애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삽입하여, 알랭드 보통은 슬픔이 주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하고있다. 그의 서술과 묘사는 실로 뛰어나서 모든 문장을 필사해도 좋을만큼이다. 난 이 분의 삶을 꿰뚫는 관통력과 일상의 작은 부분도 소중히 여기는 세심함에 감탄한다. 어느 책이나 작은것을 어우르며 큰 것을 논하고, 커다란 주제도 작게 소분시켜 피부에 와닿게 한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할 수 있을지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을것같다. 슬픔이 가득찼을 때의 마음은, 뭐랄까.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좌절감이 아닌 오롯한 슬픔은, 그자체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조금만 옆으로 기울이면 쏟아질것같은 깊은 그릇이 다 채워지면, 그 슬픔은 눈물이 되기도 하고, 외로움과 고립으로 잘 못 비껴 나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슬픔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 슬픔만으로도 충분한 존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슬퍼할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면 슬픔도 없다. 슬픔이 존재한다난 것 자체가 무엇인가를 사랑해봤고, 무언가와 함께였었고, 그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슬픔은 그 소중한 것들을 반추하게 해준다.



#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서 감당하던 외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같은 외로운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고립의 느낌을 희석할 수 잇고, 따라서 공동체에대한 느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가정적인 분위기의 결여, 환한 불빛, 익명의 가구는 흔히 거짓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가정의 위안으로부터 구원을 얻을수 있는 통로로 여겨질 수 있다. 익숙한 벽지와 액자의 사진들이 있는 거실보다는 이곳에서 슬픔에 무너지는 것이 더 편할수도 있다. 


#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가정 자체와 대립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여러가지 규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가정이 그들을 배반하여, 그들을 밤이나 도로로 내몰았을 뿐이다. 


# 호퍼적인 것.


# 외로웠다. 그러나 부드러운, 심지어 유쾌하다고 할 만한 외로움이었다.


# 정신의 일부가 다른일을 하고 있을 때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눈으로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쫓을 때. 우리의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 같고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의식에 뭔가 어려운 것이 떠오를 떄면 모른척하고 행정적이고 비 인격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풍경은 이런 부분이 잠시 한눈을 팔 도록 유도한다.


# 이따금 건물 내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쉭 하고 솟아오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호텔 방에 누워 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줄을 그을 수 있다.


#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화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를 상상하며,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수 있다고 상상한다.


#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의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늘 우리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 나는 사랑때문에 사랑하는 삶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 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신과 비 진정성에 물 들게 될 수 밖에 없었다.


# 진정한 자아는 같이있는 사람에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 자존심= 이룬것/내세운것


# 정신을 팔 일이나 친구도 없어 깊은 외로움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사랑의 본질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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