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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30. 2023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나태주 엮음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사랑.

실존하지 않는 관념.

그리고 그것이 지닌 광대한 감정의 스펙트럼.


하찮은 내가 사랑에 대해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실 막연하다. 숙연하다.

그래서 '나의 사랑'에 대해 서평을 이어나가고 싶다. '사랑'이 아닌 '나의 사랑'.


  나에게 사랑은 물푸레나무도 아니며, 타오르는 연탄도 아니다. 에바 알머슨의 그림처럼 온화하지도 않다.

  클림트의 키스, 그 불안정한 사랑이 나에겐 가장 잘 와닿는다.

Der Kuss, The Kiss

그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나는, 그저 이 그림에 대한 나의 느낌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림의 그는 절박하다. 외롭다. 온 힘을 다해, 그러나 아주 섬세하게 그녀를 감싼다. 그녀를 품기 위해 구부린 날갯죽지, 넓은 어깨의 굴곡, 그녀의 향기가 날아갈까 아쉬워 오감을 세워 그녀를 느끼는 그는, 지금 저 순간이 영원이길 바랄 것 같다. 여자는 오로지 몸을 맡겨 사랑을 받고 있는 평온하고 따뜻한 표정임에 반해, 그는 가슴이 아프다. 사랑하는 그녀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박하고 또 절박하다.


맞아.

사랑은 나에게 벅차다. 내 심장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사랑은 나를 갉는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저 남자처럼 나에게 사랑은, 온 힘을 다하게 한다.

직장에 대한 애착이던 가족을 향한 연민이던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적당한 사랑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림의 '그'처럼 젖 먹던 힘을 다해 섬세하게 그것을 어루만질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항상 마음 같지는 않다. '그것'에 대한 애정, 연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이해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황금빛으로 물이 든다.

나에게 사랑은 그저 설레고 들뜨는 핑크빛은 아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시집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삶과 죽음, 사랑 등에 대한 섹션이 따로 꾸며져 있으며, 사랑에 대한 섹션에서는 사랑이 몰고 오는 치명적인 감정들, 회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중 마음에 와닿는 몇의 시들을 필사하였다.




# 한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듯 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것은 아무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혼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가나 영원히 가질수 없는 여자, 물푸레 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



# 사랑 -김수영-


어둠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인해


그러나 너의 얼굴을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을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작은짐승 - 신석정-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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