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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21. 2023

영원 - 파도출판사 시선집 03

파도출판사, 생소하다, 엮은이가 없는 시선집, 생소하다. 처음 보는 시인들, 또한 생소했다.

음각으로 새겨진 시선집의 제목과 지은이들을 손끝으로 느끼며 한 장 한 장 꼭꼭 씹었다.

따뜻하지만은 안은 시들이다.

때로는 공허하고, 원망한다. 절박하다. 때로는 희망하고, 기다린다.

'영원'이라는 단어들을 매개체로 하는 그런 작품들이다.


동시 같고 보들보들한 감촉을 지닌 시들도 좋지만,

외줄 타기를 하다가 벼랑으로 낙하하는 시들을 사랑한다.

그런 시들이 잔뜩 실려있어서, 행복했으며 감사했다.


에세이나 소설이 크레셴도라면, 시는 디크레센도이다.

숨을 죽이며 단어를 압축해 나가는 것.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기 위에 소중하게 따르는 누군가의 술잔처럼

커다란 와인병에서 나오는 작은 와인 한 방울.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시집이 생겨서, 마음이 설레었다.







# 갈매기 

               김수빈

 미정아, 너무 추워 미정아 신촌의 밤은 너무 추워 골목길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그래서 불꽃만 만 개인데 너무 추워


미정아 신촌에서 갈매기를 본 적 있어 영원을 잡을 수 없다고 우리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시간을 긁어내 그 살점으로 영원을 매겨보려 했던 빨간 밤에 갈매기를 본 적 있어 어울리지 않는 파란 바다 대신 회색눈이 내리는 신촌에 회색 담배꽁초가 지하에 흐르는 바다로 살아 있는 신촌에 갈매기가 날았어 미정아 갈매니는 너무 하얘서 신촌에 내리는 눈보다 하앴는데 갈매기가 우리를 꾸짖더니


영원이 어딨어 영원이 사랑이 우리가 세상이 어딨어


미정아 갈매기 끼룩끼룩 다 부서진 목으로 짤갛게 울며 잿빛 지하 바다에 풍덩 빠져 골골골 꽁초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갈매기가 울어 미정아 갈매기도 없는 신촌은 너무 추워


우리가 어딨어


# 사라지지 않는 것

                               이야명

깊은곳에 묻어둔 기억이 있다


나는 그것을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들춰보지도, 찾아가지도 않았고

혹여나 새어나올까 심연 속에 꽁꽁 묶어 놓았다


그렇게 처박힌 이름도 없는 그것이

이따금 스멀스멀 기어나와 머릿속을 헤집거나

아가리 밖을 향해 눈알을 굴리기도 하는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것은

나의 존재가 지속되는한

낙인처럼 평생을 쫓아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그것 앞에 나는 그저 죄인이다.

내가 죽더라도 역겨운 그것은

나보다 더 긴 인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숨이 끊어지기를 바라다


또 가끔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 나이기에


그렇게 오늘도 피칠갑을 한 채 살아간다

죽지않는 기억 속에서


# 손바닥만한 파도를 손에 쥐고

                                       황예빈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못했다.


약속한 시간의 반도, 그 반도 

채우지 않고 떠나 버렸지만

그래서 남은 것은 또 나였지만


홀로 앉아 누구도 탓하지 않고

마음을 멀리 보냈다


떠나간 오늘의 너는 

나를 단 한순간 사랑했겠으나

어떤 날의 너는 

나를 영원히 사랑했음을 안다


그날 우리가 본건

마르지 않는 바다가 아니라 몸집보다 큰 파도였다

억겁이 시간이 아니라

무한할 것만 같이 커다란 질량이었다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다른 사람처럼 하는 말을


홀로 앉아 

가만히 듣고

마음을 멀리 보냈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늘 너는 내게 줄 것이 없으나

어떤 날 네가 보여준 파도는

정말로 영원히 컸다는 걸 안다


#눈동자

                            백유쥬

호수의 눈처럼 동그랗게 뜬 달을

남몰래 오려와서

테두리를 따라 걷고 걸었어

함부로 젖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지만 남은 옷도 

신도 없는 주제에 몸이 자꾸 기울고

물장구를 치고 싶잖아

찰랑거리고 싶잖아

발끝에 스며드는 처음 겪는 온도

일렁이는 물결에 점점 맨몸이 되고

온몸이 투명해지도록 

헤엄 쳐들어가

달 한가운데로

호수 한가운데로

빠져 죽을 걸 알면서

빠져 죽기 위해서


# 초

        김서랍

떨어지는 촛농 앞에 떨리는 손을 모은채 서있다

언젠가는 녹아 떨어질 촛농임을 알아도

지금의 이 불빛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작은 촛불 앞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촛농이 촛대를 타고 눈물처럼 흐르고


까맣게 타버린 심지가 짧아져도


나는 이 작은 불빛이 영원하길 빌었다.

내게는 너무도 큰 불빛이어서,

그 불빛이 영원하길 빌었다

영원이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가운 현실 앞에서 나는 영원을 기원했다.


# 저기 먼 모스크바 행성너머

우주 끝으로부터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 

당신과 함께


최경석-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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