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이들이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멀어져 갔다. 어떤 이는 나의 진정성을 의심했고, 어떤 이는 내 감정의 파고를 견디지 못했다. 어떤 이는 나의 종잡을 수 없는 출몰에 손사래를 쳤지. 그렇다. 내가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젊은 날의 많은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옮겨 다니는 학교마다 모임이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을 따로따로 챙기느라 방학에는 거의 쉴 틈 없이 보냈었다. 내 경계를 허물면서 까지 모든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울증으로 고역을 치르던 어느 날은 억지로 한 모임에 나갔었다. 한 친구가 날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너 온몸에 마른 밥풀이 있어.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며.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번 방학은 다르다.
시절인연에 감사하며, 흘러가는 것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다. 애쓸 필요도 없다. 그저 한파에서 날 구해줄 작은 집과 따뜻한 가족, 잔잔한 BGM과 커피, 창가의 3500k 파장의 햇볕이 있음에 감사하다.
나의 고요함은 차가움이 아닌 자기 회복이다.
#2
내 생존환경의 스펙트럼은 넓지 않다—대신, 아주 정확하다. 새벽에 엠비언트를 틀어놓고 잠든 식구들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가장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며칠 전 친정식구들에게 경계를 세웠다.
"우리 집에서 모이는 것은 좋은데 3시간 이상 함께하는 것은 내게 벅차"
아마 무척 서운했을 것이다. 그동안 명절과 모임마다 함께 1박을 보내왔기 때문에. 쉬운 말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큰 용기가 필요했다.
부모님께도 최소한의 도리만 다하기로 했다. 어린 가장의 역할은 40년 동안 한 것으로 충분하다.
관계는 넓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을 만큼은 남겨놓는 것.
나는 가족을 조금 멀리하는 것을 택했다. 다시 말해, 나를 버리는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3
3월부터 진짜 학교로 돌아간다. 출근이 아닌 출석을 하러 간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옮겨가며 18년간 학교로 출근을 해 온 나는,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학생 신분이 된다.
20대 중반에 끊어진 가방끈이 어디 있나 주섬주섬 더듬어본다.
그걸 간신히 찾아 다시 가방끈 길이를 늘이게 되었다. 드디어. 비로소.
그래서인지 2월만 되면 도지던 개학증후군이 온데간데없다. 막연했던 불안감은 사라지고, 약이 없이 잠든다. 학교가 싫어서가 아닐 것이다. 비로소 내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충만함이다.
학기말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번개처럼 일하고, 동시에 면접과 서류를 준비하느라 망가졌던 컨디션도 궤도를 찾아 돌아왔다. 몸무게는 줄었지만 근육량은 늘었고, 숨쉬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4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사나운 구석이 있다.
한번 발톱을 세우면 다시 숨기는데 한참이 걸린다.
그동안 날 지켜준 생존 OS는 역시나 교체시키기 어렵다.
그것을 길들이는 중이다.
오로지 내 경계를 세우는 일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천천히 모르타르를 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