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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 Mar 29. 2016

뒷담화

말의 민낯에 대하여.

1.

어느 날 동료 F와의 대화.


"너 그거 알고 있었어?"

"뭘?"

"그만둔 A 디자인팀장님 말이야. 실은 B 기획팀장님이 날린 거래."

"사장도 아니면서 어떻게?"

"사장님이 B 팀장님 말은 무조건 듣잖아. B 팀장님이 맨날 A 팀장님 일 하는 거 맘에 안 든다고 우리한테 씹었던 거 기억 안 나? 디자인도 까고 그랬잖아. 사장님한테도 자주 B 팀장님 험담을 했다고 하더라고. 얘기가 안 통한다고. 자를 때 B 팀장님 입김이 많이 들어갔대. 원래 편 가르기 좋아하는 사람이니 뭐. 그것 때문에 문제도 많았고."


회사 밖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힘의 고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 관계에 뿌리를 둔 뒷담화들이 낱말의 영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 날아든 F의 이야기는 더없이 솔깃했다. 믿어 의심치 않을만한 이야기였다.


나는 호응했다.


"아 진짜? 대박! B 팀장님이면 그럴 만도 하지. 암튼 못돼 처먹었어. 인간이."


흠, 밀담의 유혹은 언제나 솔깃하다. 분노의 대상이 정확할수록 더.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평소 미움을 산 캐릭터의 면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삼자를 향한 뒷담화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명료하다.


2.

또 다른 어느 날 점심 후 티타임.


"야 너만 알고 있어. 얘기 들어보니까 Y가 그일 때문에 마음이 좀 상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받은 것 때문에?"

"그동안 자기한테는 그런 인사치레가 없었으니까. '더 오래 일한 사람은 자긴데' 하는 마음이 있겠지."

"그것 때문에 우리가 눈치 볼 필요는 없잖아. 짜증 나네."

"그때 오고 간 얘기들도 좀 그랬잖아. 뻔히 다 같이 있는 데서 비교하면 Y 입장에선 기분이 안 좋을 테지."

"고작 그런 일에 맘 상해서 내내 울상이었던 거야? 아 일하기 싫다."


평소 잘 지내온 선후배, 동료 사이에도 아주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가져오는 파고는 엄청나다.

잠시 펄럭인 순간, 오해는 쌓이고 실망은 거대해지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만큼 상실감이 급속도로 자라나고, 뒷담화의 페이지도 덩달아 늘어난다.


'나와 네'가 얽힌 뒷담화의 페이지 끝에는 허탈함만 남는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파트너였던 A와 B는 어느 순간, 사이가 틀어졌고 B는 A를 험담하기 일쑤였다. A가 뒷담화를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나, B가 뒷담화를 하는 모습은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것만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B의 모습을 나와 F와 Y와 Q와 Z는 비난했고 각자 '비밀'의 이름으로 간직한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서로 공유했다.  


그러다 공유의 균형이 조금씩 어긋나면서 뒷담화의 주인공들은 늘기 시작했다. 마침 섭섭한 일들도 생겨났다. F와 Y에게 알 수 없는 벽이 생겼고, 나와 Q 사이에도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Z와 F, 또 Y와 나의 문제까지 생기기에 이르렀다. 마치 꼬리잡기를 하듯, 섭섭함과 실망감은 매번 그 실체와 대상을 달리하며 반복되고 반복됐다.  


뒷담화의 개체수는 점점 늘어났고, 서로에게 자기를 보호하느라 아우성이었다. 그 번식력은 가히 바퀴벌레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정다웠던 우리가, 이토록 흉물스러운 사이가 되었다니.


그렇게 깨달아도 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관계의 지반은 흔들렸고 지층은 이미 몇십 도나 틀어져 있었다.

나도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그렇다면 과연 뒷담화가 나쁜 것인가. 아니다. 뒷담화는 나쁘지 않다.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말을 나누는 사람이, 말로 누군가에게 직접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택할 수 있는 자기 위안이란, 뒷담화밖에 없지 않은가.


'남을 헐뜯지 말라'는 현인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십이지장을 조여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보다, 지금 당장 화를 삭여 줄 현란한 입놀림에 자신의 바이오리듬을 맡기는 게 정신건강에는 훨씬 좋다. 내장 건강은 물론이고. 뒷담화는 '어느 정도' 착한 성질의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뒷담화는 '공감능력'을 필요로 한다. 뒷담화는 뒷담화로써가 아니라 너와 내가 나누는 '공감'으로써 비로소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말이 아닌 감정을 나누고 그리하여 우리는 '동지'라는 일체감을 맛보게 하는 것. '뒷.담.화.'




그런데 아는가. 일체감이 사라지면 뒷담화의 순기능도 사라진다는 것을.


한바탕 떠들고 사무실에 들어오면 다시 잊고 시작. '하하호호' '열심히 일하자' '으쌰 으쌰'. 뭐, 이런 것들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더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해 뒷담화를 했는데 떠도는 말들 중 몇몇 말들은 가시가 되기도 했고, 이에 낀 시금치처럼 걸리적거리기도 했다.


없을 땐 나라님도 욕한다고, 그 흔한 상사 욕이야 얼마든지 '노 프라블럼'. 문제는 그 화살이 더 이상 한 사람만을 향해 있지 않을 때 생긴다. 일체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B가 됐다가 A가 되고, 다시 B가 됐다가 내가 되고, 또 Y가 됐다가 Q가 됐다가...

그러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라는 자조가 스밀 즈음이면, 이미 각자의 바다엔 높고 거친 파도가 무수히 인 뒤다.


첫 소절만 부르면 좋았을 것을, 너무 긴 시간 반복한 탓이다. 꽃노래도 하루 이틀 이랬는데.

지겨운 노래 속에 갇힌 낱말들을 이리저리 해부해보다가, 결국 삼자가 아닌 너에게로 또 다른 너에게로, 다시 다른 너에게로. 공중에 떠도는 무수한 말들은 여럿의 '너'에게 위안이 되었다가, 무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삼라만상이 엉킨 이 복잡한 우주에서 뒷담화를 그만둘 수 있을까? 우리가?  


쾌감이 불안으로 역류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해도, 뒷담화는 나약한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간편한 '예방주사'. 고로 멈추긴 어렵다. 싸우지 않고 그저 잘 지내보겠다는, 이렇게라도 견뎌보겠다는 최소한의 노력이자 방어니까.   



그 일체감이라는 것이, 실은 커다란 배신감을 그림자 삼은 것이라고,

뒷담화의 속성이 뿌리까지 착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의 민낯은 그런 모순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다시 일깨워줄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뒤에서 씹으며 말로 공감하고, 말로 위로받을 것이다.




자, 떠들라. 못돼 처먹은 것들을 위하여.

상처 주지 않기 위하여.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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